사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완전하다'는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나도 안다. 하지만 분명 나는 완전하다.
음력 팔월 보름, 가윗날(추석)을 기준으로 침대 머리맡에 이런 문장을 적어 놓았다. 매일같이 내가 쳐다보는 문장.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나를 맞이하는 문장.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약간의 지적을 받을 때도,
"아~ 예예."
"오늘 참 잘하셨어요. 인원이 많아도 이제 너끈히 진행하시네요."
뜬금없이 칭찬을 받을 때도,
"아~ 예예."
"졸려요. 배고파요. 빨리 끝내 주세요."
내 비대면 수업에 대고 하품을 하는 학생들을 맞닥뜨릴 때도,
아~ 예예."
"어, 이런 수업 재밌다!"
내 수업에 대고 만족스러운 끄덕임을 보이는 학생들을 마주칠 때도,
아~ 예예."
"(물티슈 뚜껑이 열린 것을 본 우리 엄마 왈) 넌 뒤처리를 제대로 해 놓은 적이 없더라."
"아~ 예예."
다소 억울한 마음이 올라올 때도 나는...
나는 완전하다.
모자람과 부족함이 너무 넘쳐흘러 그것들로 파도를 만들다가 기어이 나의 온 생을 '결핍의 바다'로 만든다 해도... 완전할 것이다.
그런데 그 결핍의 기준이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기준이었을까.
친구야, 난 요즘 이러고 살아. ('나는 완전하다' 액자 사진을 보여 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렇게까지 불완전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리고 누구의 판단에 따라서 완전해졌다가 불완전해졌다가 쓸 만한 사람이었다가 하등 쓸데없는 사람이었다가... 그게 맞는 걸까?
'나는 완전하다'라는 문구의 유통기한 혹은 소비 기한이 언제까지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이건 안다. 칭찬을 받아도 그건 그냥 나, 비난을 받아도 그건 그대로 그냥 나. 누구의 칭찬에 따라 내가 완전해지고 누구의 비난 여부에 따라 내 가치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과 이런 문장 덕에 요즘 나는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느슨해지니 숨구멍이 생긴다. 숨구멍이 생기니 정말 조금은 완전해지는 느낌이다. 그 느낌을 되도록 오래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