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by 봄플

야근이 끝난 후 택시를 타며 여러 가지 생각을 흘려보낸다. 택시를 타는 게 맞나, 셔츠를 제대로 입고 있는 게 맞나. 작은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하루 종일 나를 감싸고 있던 이 셔츠는 어느새 내 일부가 되어버렸다. 스타일은 내가 침묵할 때 말해주는 전략이라서, 회의보다 먼저 나를 말해주는 건 셔츠다.

말은 줄이고 핵심을 말하는 게 대화라고 배웠지만, 정작 나 대신 말해주는 건 셔츠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이런 셔츠도 택시를 타면 흐트러지는 듯하다.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나. 하루 종일 곧게 펴고 있던 어깨가 드디어 내려앉는다. 이제야 진짜 하루가 끝났다는 걸 몸이 알아차린다.

대화

요즘 택시기사들은 말이 없어졌다. 예전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이제는 목적지만 말하면 그만이다. 때론 이 침묵이 감사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고해성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잃은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안전하게만이라도 집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택시아저씨들이 말수가 줄어든 덕분에 나는 더 많은 생각을 혼자서 하게 된다. 다리의 불빛들을 보아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저 일 방법과 방향, 대화와 태도의 의도, 새로운 모색 등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늘 하루를 돌아보게 된다. 오늘 회의에서 헛소리를 한 건 없는지, 팀원들에게 너무 모질게 하거나 너무 잘해준 건 없는지 회상해보기도 하고, 상사들에게 너무 밑 보인 건 없는지, 약점 잡힌 건 없는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더 깊은 고민에 빠진다. 새롭게 투입된 업무를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꺼리는 일을 맡아온 경험은 많았고, 그때마다 힘겹지만 결국은 끝내왔다는 기억이 있다. 감당하기 싫은 순간에도, 옆에서 착륙할 수 있게 돕는 손길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고, 그 과정을 통해 마침내 혼자 설 수 있었다는 안도도 있었다. 그때는 내가 강해진 것 같았고,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원망

하지만 현실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불합리한 구조나 어긋난 방식에 오래 매달리면, 결국 남는 건 피로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원망할 시간만큼은 필요했다. 현실을 탓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잠시나마 원망에 머무르고 싶은 충동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서로를 보완하고 있었다.

원망은 나약함이 아니라, 일종의 방어였다. 모든 책임을 나 혼자 짊어지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 "내 탓만은 아니다"라는 최소한의 자기보호였다. 그 작은 틈새 덕분에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체력이 남았다. 원망이 없다면, 감정은 곧장 자기비난으로 뒤집혀 더 깊은 피로와 무력감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원망은 도착지가 아니라 경유지에 가깝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마주했을 때, 원망이라는 짧은 우회로를 거쳐야 비로소 다시 길 위에 설 수 있다. 원망으로 오래 머무를 건 아니지만, 잠시 앉아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은 필요한 것 같다. 거기서 충분히 호흡을 가다듬은 사람만이 다음 걸음을 뗄 수 있다.


한강

이런 생각들에 잠겨 있으면 어느새 택시는 한강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집까지의 거리는 멀었다. 한강을 건너야 하고, 끝나지 않고 한강을 따라 갔다. 어느 날은 여러 터널을 지나야지만 도착할 수 있었다.

강을 끼고 가면 아파트와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아름답기도 했고, 어둠을 지나다 밝은 조명으로 바뀌면 생각도 바뀌는 듯했다. 그 빛은 내 셔츠에 닿기도 하다가 내 볼에 닿기도 했다. 어떤 빛은 얼굴에 비춰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을 때가 있었다. 이런 빛들은 내가 무슨 생각했는지 까먹게 하기도 했다.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어둠을 만나면 또 사색에 빠졌던 것만 같다. 신기한 일이다. 빛이 바뀌면 감정이 바뀌고, 그에 따라 스타일도 달라진다.

때로는 이런 풍경을 보며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업무량을 생각하면 금세 포기하게 된다. 제대로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럴 때엔 쉬지 않는 게 답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 회사를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택시 창밖으로 흘러가는 도시의 불빛들은 마치 내 생각들처럼 덧없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지나가고, 나는 여전히 집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시간이 되면 늘 그렇다. 저녁시간은 많은 시간 원망하게 된다. 원망하기 위해 원망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시간. 정리가 필요하고 사색이 필요한 시간. 무엇이 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오늘은 무엇을 했는가.

그래서인지 잠들고 싶기도 하고 잠들기 싶지도 않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을 찾고 싶지만, 술마시며 온전치 못한 상태로 있는 건 극혐이다. 그래서 술 대신 선택했던 건 음악이다.

택시 안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음악이, 혹은 이어폰을 통해 듣는 내가 선택한 음악이 이 모든 생각들을 감싸 안는다. 음악은 술처럼 나를 흐트러트리지 않으면서도, 무게를 덜어준다.


2025.08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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