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비 내리는 날의 커피 향은 그윽하다. 찻장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커피가루를 꺼낼 때면, 신의 은총이듯 보이지도 않은 가루로 향을 뿜어낸다. 마치 나를 환영하듯. 물을 끓이고, 드리퍼에 종이 거름망을 두고 살짝 물을 적신다. 조금 시간이 지나 커피가루를 약간 붓고, 물을 조금씩 붓는다. 커피는 마치 일렁이듯 타는 듯했다. 그 향을 머금고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내뿜었다.
어서 와.
커피맛은 사실 커피 향만큼 로맨틱하지 않다. 기분에 따라 일지 비가 내려서 일지 모르지만, 깊이가 다르고 맛이 달라 자주 찾게 되는 것 같다. 비는 이 커피맛을 더 깊이 있게 해 준다.
마치 자연이 나에게 선사하는 또 다른 어른의 맛처럼.
나에게는 감정에 따라 다른 음료를 찾는 습관이 있다. 나는 슬프거나 답답할 때에 술을 찾지 않는다. 커피 끓일 물을 올리면서 생각하거나, 정리를 한다.
대신 나는 기쁠 때에 와인을 찾는다.
슬플 때 마시는 알코올은 나에게 더 깊은 슬픔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생각이 정리되기보다는 지연되는 기분이 든다. 해결되지 못한 슬픔을 빙빙 돌려가며 나중에 찾으라 하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기쁠 때만 술을 찾는다. 아마 나는 유독 증류주 보단 곡류나 과일주만 맞는 듯하다.
최근 기쁨의 순간이 내 삶에 잠시 찾아왔다. 퇴사는 처음에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그토록 원하던 자유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슬픔의 감정이 잠시 잠깐 사그라질 때, 이 자유의 기쁨을 더욱 느끼기 위해 와인을 마신다. 특히, 해가 따스히 비추는 숲에서 마시는 술맛은 더욱 싱그럽다. 마치 그 맛의 깊이를 더해주는 맛이다.
지난 10년 동안 지금을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취미가 실업자 브이로그를 보는 것이었는데, 늘 부러워하며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다. 인생에 있어 자유를 받으면, 아침에 산뜻하게 운동하고 바삭한 빵을 구워 먹으며 시작하게 되는 하루를 매일 꿈꿨었다. 하지만 막상 바라는 바를 얻으니, 깜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커피를 내리면서 내 생각도 거름망에 걸러지듯 기쁨과 슬픔을 분리되었다. 아침의 커피 한 잔, 비 오는 날의 고요함,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꿈들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얻은 자유로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나도 궁금하다.
나는 많은 계획이 있다. 원래 백수가 더 바쁜 법이다.
다행히 돈이 들지 않는 계획이다.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고 사색적인 글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연구도 지속적으로 하고 싶다. 글은 일하면서 쓸 수 있었는데, 연구나 소설은 그렇지 못하다. 이번 기회에 연구자적 지적 수준이 높은 글도 써보려 한다. 그리고 못다 쓴 단편소설을 마무리하여 공모전에 내보려 한다. 단편소설은 5~6년 전에 쓴 글이었는데, 그때와 또 다른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아마 내 인생에 그리 많은 돈은 필요치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꿈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있다. 글로 돈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현실 앞에서 꿈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때로는 무겁게 다가온다.
이 모든 것이 신이 내게 주신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여 일하고 있음에 감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더 크게 원하던 건 밖이 아니라 안에 있었다. 어쩌면 진정한 행복은 외부에 정처 없이 주행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주차시키며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인생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비 오는 날의 커피 향, 기쁨과 함께 마시는 와인, 그리고 그 순간순간을 깊이 느끼며 살아가는 설레는 마음. 이런 소소한 감각들이 결국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진짜 보물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이 시간들이 더욱 나를 생기 있게 하고, 여성성을 되찾아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려 한다. 비 오는 날 커피 한 잔과 함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새로운 시작을 향한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고 있다. 앞으로의 길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확신만은 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마주할 기쁜 순간들에는 따스한 와인 한 잔으로 축배를 들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빗소리와 함께 커피와 와인과 음악은 더 짙게 다가온다.
2025.09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