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철이에게.
얼마 만에 가져보는 여유로움인지 모르겠다.
조금 늦게 자고 조금 일찍 일어나는데도 나를 위해서 쓰는 시간이라곤 고작 네게 편지 쓰는 시간뿐이니깐. 그래두 어쨌거나 보람은 있어. 지금 하는 일에 있어서 말야. 나중에야 어찌 될지 모르지만... 이것두 나를 위한 거긴 하구나. 내용이 좀 우스워졌네. 결론은 느긋하게 너한테 편지도 쓰고 음악도 듣고 그리고 생각도 하고 잠도 좀 더 많이 자고 이래저래 그냥 기분이 좋아. 시간에 쫓기지 않구. 비록 이틀뿐이지만. 시간은 시간대로 없고 잠은 잠대로 못 자고 회사 가서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고 논은 토끼눈이 돼서 보는 사람까지 피곤하게 만들고 그랬거든.
내일은 주말이야. 비참하다 요즘 날씨도 좋던데...
며칠은 추운가 싶더니 엊그제부터는 춥지도 않고 딱 좋던데 날씨만 좋으면 뭐 하나. 같이 놀러 갈 사람두 영화 보러 갈 사람두 없이 이번에도 꼼짝없이 집에만 있어야겠는 걸. 친구들이나 만나야겠어. 내가 좀 바뻐서 얼굴 본 지 오래됐거든. 그냥 그렇게나 보내야겠어. 언제나 그랬듯이 말야.
어젯밤 꿈에 너를 만났어.
얼굴은 정확히 기억 안 나고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바로 너를 봤다는 것. 너와 내가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거 같았는데 전혀 생각이 안 난다. 암튼 꿈속에 네가 보이길래 특박 나올리는 절대 없을 테고... 해서 혹 전화가 올려나 싶어 하루종일 기다린 거 너 아니?
그래, 한편으론 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한테 전화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어. 그래도 기대했었나 봐. 하지만 역시나 전화는 오지 않고... 개꿈인가 봐. 아무런 풀이도 할 수 없는 개꿈... 그래서 묻는 건데 오늘 별일 없었지? 어디 다치거나 아프거나 한 거 아니지?
그래 알 수는 없지만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게. 몸도 건강하구 마음도 건강해져서 부디 남은 군생활 내가 없어도 잘 마치길 바랄게. 아니 넌 분명 해낼 수 있을 거야. 내가 없다는 걸 가정했을 뿐이지 그렇다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내 뜻은 그 정도로 몰론 너한테 하찮은 나인 거 알지만 내가 없어도 될 정도로 강인해지라고. 씩씩하구. 누가 뭐래두 해낼 수 있는 네가 되라구. 그래서 한 얘기야. 네가 원한다면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힘내, 삼철아! 시간이 금방 흐를 거라고 조금 있으면 나아질 거라구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지만은, 언젠가는 꼭 좋은 날이 올 거라는 거 그거 하나는 분명하잖아. 그렇지?
추운 날씨에 몸 건강하구. 화장품 챙겨 바르고,
음... 당부하고 싶은 거 많지만 잔소리 같을 거야.
잘 지내, 은경이가 또 편지 쓸게
1998. 11. 13.
아마도 적응이 되어 가는 것 같다.
힘들어하던 회사 그리고 함께 앓던 면회 앓이 또한 그렇다. 꼭 적응이 아닐 수는 있겠지만 안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편지의 내용들은 사뭇 다르다.
모처럼 화창한 주말 날씨에 함께할 사람도 없는데 꿈속에서 만난 나로 인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무턱대고 내 전화를 기다렸다. 기약 없는 바람에 기분까지 좋아졌지만 실망이라는 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하루종일 기다린 오지 않은 전화에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그러고 나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기다림은 대게 약속을 전제로 하기에 자체로 행복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약속이 어긋난 기다림이 실망으로 바뀌어 행복이 깨질 때도 많지만, 우리는 기다림이 이미 가져다준 행복으로 행복과 불행을 상쇄시키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그러나 약속이 없는 막연한 기다림은, 실망할 것을 모르지 않지만 머리보다는 가슴의 활동으로 하게 된 잠시의 행복은 더 큰 아픔을 가져오고 셀프 위로의 정당성을 전혀 부여하지 못하는 것 같다. 범인인 가슴은 찔려서 인지 이제 180도 달라져 과하게 불행을 느끼도록 활동한다. 이 과정에서 잠시 소외돼 있던 죄 없는 머리는 급하게 움직임을 재개하여 끝내는 자책에 이른다.
자책이 찾아온 이후부터는 온전히 머리의 시간이다.
약속한 기다림이라 하더라도 2년도 훨씬 넘게 남은 그것은, 행복이 아닌 우울과 슬픔일 수 있다는 것을 오늘의 경험으로 예상하게 된 것 같다. 예상은 스스로의 부재, 즉 나와의 이별까지 가정하게 했고 나에 대한 당부로 이어졌다. 스스로를 표현한 '하찮은 나'는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일종의 정당성이 내재된 것이리라.
그래도 언젠가는 꼭 좋은 날이 올 것이고 그것을 확인하려는 듯한 '그렇지?'가 더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그녀의 말처럼 분명히 좋은 날은 왔다.
우리는 언제나 좋은 날을 기다린다.
아무리 좋은 날이 찾아오더라도 막연히 다음 좋은 날을 또 기다린다. 그렇기에 그 기다림은 위로도 자책도 동반하는 법이 없긴 하다. 사는 동안은 계속되는 기다림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날들을 추억하며 그 주인공인 가족과 함께 좀 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휴일
오늘도 참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