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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Sep 15. 2024

두 글자

은경이가

너한테 칭찬받기 위해 나 또 너에게 편지를 쓴다. 나 착하지?
오늘도 여전히 나의 하루는 변함이 없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 뭐 재미있고 신나는 일 없을까?
너한테 이런 거 물어보기 되게 미안하네. 그러구 보니깐 네가 참 힘들겠구나. 이런... 누나가 되서리 동생 걱정도 안 하고, 나쁜 누나, 훈련받기 힘들지? 날도 덥고.

여기 날씨도 장난이 아니야. 엊그제 장마가 끝났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침부터 무지 덥다. 땡볕에... 올여름은 자연선탠(?)하게 생겼어. 이런, 너도 그렇겠다. 새까만 너의 모습. 하하 웃기겠다. 키도 작은 게 까맣기까지 하면 너 정말 볼만하겠다.

그나저나 웬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지? 너 입대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네가 이 편지를 받아 볼 때쯤이면 3주가 지나겠다. 너두 느끼니? 시간이 엄청 빠르다는 걸. 하긴,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더 빨리 느껴진다니깐 나보단 덜하겠네. 넌 시간이 엄청 안 가지?

어째 오늘 편지는 저번보다 더 횡설수설하는 거 같아.  아무래도 나 더위 먹었나 봐. 우째 잉~
그래두 철이는 편지 받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으니깐 할 말 없겠지 뭐. 속으로 궁시렁거리기만 해 봐라. 콱. 그냥.
네가 내 옆에 없다고 모를 줄 알아?
앉아서 삼만리 서서 구만리를 본다. 내가. (근데 웬 유치?)

……

근데, 정말 궁금한 거. 너 내 편지 받아보긴 한 거야? 순서대로 잘 읽었어? 내가 편지봉투 뒤에 번호 매겼는데... 오늘은 이만 자야겠다. 담에 또 편지 쓰께.


1998. 7. 30.

P. S.  너 전화 못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지? 그치? 나쁜 것
        연락하기 싫음 마라. 바보야.



편에서 무척이나 아렸던 내 가슴이 무색할 지경이다.

몇 개월 빠른 누나 행세는 그렇다 치더라도 갈수록 태산이다. 키도 작은 게 까맣기까지 하면 볼만하겠다???

자, 이 대목에서 직전 편지와 연결시켜 보자. 내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면서 나열한 안경 쓴 거, 입술 두꺼운 거, 얼굴에 점 많은 거, 곱슬머리... 거기다 까맣기까지 하면...

난 둘리친구 마이콜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마이콜은 키라도 크지...


외모비하도 모자라 시간이 빠르단다. 기껏해야 20대 초반에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니... 

이제 훈련소에 갓 입소 훈련병에게 이게 할 소리인가?


‘더위 먹었나 봐.’


스스로의 횡설수설에 대한 인지와 인정의 표현 임에 틀림없다. 솔직히 더위가 아니라 약주를 드신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물론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음주상태라는 추정에 설득력을 더하는 것이 바로 ‘앉아서 삼만리 서서 구만리를 본다’는 구절이다. 에효~


추신에서는 아예 대놓고 막말을 날린다.

남달리 오랜 만남 끝에 결혼에 이른 부부의 젊은 날 풋풋하고 달달한 러브스토리를 기대하시는 독자분들이 계시다면 이를 무색게 하는 글귀가 연속된 편지와 본문에 송구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편지를 선택한 이유는 그녀가 내게 던진 짧은 마지막 줄, 운명의 두 글자 때문이다.



이 두 자가 바로 오날날 내 인생을 바꿔버렸다.

상호의 기억에 시기와 장소적 차이는 있으나 입대 전 만남이었다.

나란히 앉아 있는 중에 그녀가 내 어깨에 살포시 기대 왔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다. 조심스럽게 내려본 그 잔인한 각도에서는 기대 있는 얼굴 아래 입술이 가장 또렷이 보였다. 빠알간 그것은 정말 너무도 예뻤다. 입을 맞추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뻘건 밀물정맥을 통해 밀려드는 듯 내 심장은 대책 없이 혼자 날뛰기 시작했다. 심장의 과부하와 함께 침 삼키는 것도 잊은 내 몸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진정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나는 절실했으나 지나치게 솔직한 살기위한 날숨 한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너 그렇게 계속 가만히 눈 감고 있으면 뽀뽀한다???”


이런, 유치원생 소꿉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멘트 하고는... -_-


살짝 고개 돌리며 눈을 들어 스윽 한 번 나를 올려볼 뿐 그녀는 이내 같은 자세로 돌아간다.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이 없다. 심장의 쿵덕과 목의 꿀떡의 화음은 이제 휘모리장단을 이루어 내 몸속에서는 한바탕 사물놀이판이 벌어졌다. 그런 나와 달리 사방은 고요했고 그녀는 역시 미동조차 없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잠시의 정적이 흐른 뒤...

로지 문제의 그 입술 만을 살포시 움직여 그녀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 폐부를 저미 한마디...


 “바보”


난 참지 않았다.

아니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야 살것 같았다.

아내와 내가 처음 나눈 입맞춤이었다.




그 입맞춤, 그 입술이 한 사나이의 인생을 통째로 삼켜버릴 줄을 그때는 정녕 알지 못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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