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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Sep 18. 2024

소나기

이쁘니

철이에게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혹 도움이 되었으면 싶은 마음에 보내는 거야. 많이 보낼 수도 또 여러 가지를 보낼 수도 없긴 하지만, 이미 누군가가 네게 보내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우연히 알았어. 통신에 들어가서 채팅하다가 그 여자아이의 남자친구도 공군엘 갔다지 머야. 너와 같은 날에.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자기는 그 친구한테 대일밴드 많이 보내줬다고 하더라고. 첨엔 군화땜에 많이 까진다면서 여러 가지 얘길 해줬어. 군에 가기 전에 로션(?) 아니 파스대신 바르는 약하구 상처난데 바르는 거 또 두루마리 화장지, 대일밴드. 특박 나올 때를 대비해 넉넉한 돈과 편지지, 편지봉투, 우표 등등 한 보따리 싸갔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내가 네 애인은 아니더라도 참 미안한 거 있지. 아프단 핑계로 만나지도 못하고. 챙겨주기는커녕 구박이나 하고. 하지만 너 애인 생기기 전까지는 많이 챙겨주께. 약속은 못하지만... 그래서 그 얘길 듣고 편지 보내려다가 다시 뜯어서 지금 쓰는 편지와 같이 보내려던 참이야. 들키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면서 방법을 가르쳐 주더라구. 편지지 사이에 쫘악펴서
(평평하게) 그래야 들키지 않는다구. 근데 저기 노란 편지지에 보내려니까 영 안 맞는 거 있지. 대일밴드와 편지봉투 사이즈가. 그래서 이렇게 설명을 덧 붙인 편지와 함께 다른 편지 봉투에 보낼려구. 나, 착하지? 근데 이 뒤에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네가 시를 좋아할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시가 있길래 그냥 무작정 적어 보내는 거야. 좋아한다면 앞으로 많이 적어 보내줄께. 명시만 골라서 마음에 쏙쏙 들어오게. 넌 우중충하고 우울한 거 좋아하니깐... 음... 칼릴지브란의 옛사랑에 대한 시 정도면 충분하겠지? 진짜 나같이 착한 누나 있으면 나와보라구 해. 너희 친누나도 이 정도 못해줄 거다. 지금 감동하고 있겠지?

근데 요즘은 뭐 해? 군인 아니 훈련병의 하루일과가 궁금해서... 쉬는 시간은 있는 거야? TV도 볼 수 있어? 음... 또오, 그게 다네... 여하튼 그게 젤 궁금해. 하루종일 머 하나. 군화 끈 매는 연습 하나 아님 총 잡는 방법 배우나, 또는 군복 다림질 배우나? 근데 좀 웃기다. 군인이 할 일이 그렇게 없질 않을 텐데 써놓고 보니 우습다. 그래도 내가 보기엔 특별히 할 일이 없는 거 같은데…

왜 물어보냐구? 할 일 없으면 나오라구... 하하, 나와서 나하고 놀자구.


1998. 8. 3.



소나기

사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정한 친구이고 싶다.
다정한 친구이기보다는 진실이고 싶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너에게 만남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순간이 지나가듯 우연이기보다는
영원한 친구이고 싶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너와 나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오늘 만남이 그러하듯이
너와 나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진실로 널 만나고 싶다.

그래
이제 너 나 이기보다는 우리이고 싶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실을 언제까지나 변치 않는
만남으로 접어두자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하늘을 주고
내가 꽃이라면 너에게 향기를 주겠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너에게 사랑을 준다.


나는 채팅 속 여자아이의 애인과는 대조적이었다.

지독히도 시력이 좋지 못했기에 안경 두벌만을 준비해 입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가 알려주거나 챙겨주지 않았고 나 또한 달리 준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편지 속 그녀의 말처럼 친 누나가 둘이지만 받아보지 못했던 관심과 염려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많이 고마웠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애인도 친구도 아닌 나에 대한 마음으로 가상의 공간에서 공통의 관심사가 있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챙 보낸 정성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뒤늦음으로 인해, 보내면서도 미안해하는 아내의 마음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잔잔하게 전해져 온다.


아내 덕분에 오랜만에 좋은 시도 감상할 수 있었다.

하나하나가 한줄한줄이 의미롭게 다가온다. 이 시를 읽으니 요즘 차만 타면 흘러나오는 또 다른 소나기가 떠오른다. 선재에게 업고 튀라는 건지, 선재를 업고 튀라는 건지 모를, 한글 문장에서 조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일깨워주는 철 지난 드라마의 주제곡말이다.

상당기간 일관성 있게 우리 현빈, 우리 현빈 하면서 좋아하더니만 그가 품절남이 된 이후의 방황이 선재로 종결되는 것 같기도 하다. 여자들이란 참... 우리 현빈은 무슨... 난 그래도 아직 우리 예진이가 최곤데?!


요즘 그녀와의 지난 기억을 들춰보며 살아서인지 글마저 닮아가는 듯 옆길로 샜지만, 또 그래서인지 소나기의 마지막 구절이 꼭 내 마음 같아 기억이 오래 머문다. 이 소나기도 참 괜찮은 것 같다.


그대는 사랑입니다.

하나뿐인 사랑

다시는 그대와 같은

사랑 없을 테니

잊지 않아요.

내게 주었던

작은 기억 하나도

오늘도 새겨봅니다.

내겐 선물인 그댈



훈련소에서는 편지가 와도 훈련병에게 전달해 주지 않는 짧지 않은 기간이 있다. 아마도 이 편지 또한 한참 후에 내가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이렇게 새겨보니 바로 읽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문득 찾아왔다.

그때 읽어버렸다면 은경이와 놀기 위해 정말로 그곳을 뛰쳐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인 이쁘니의 부름에 달려가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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