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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Sep 22. 2024

*새꺄! 물 끓여.


삼철이에게...

오늘은 그냥 자려했어.
근데... 뭔가 참 허전한 느낌야. 그게 뭔지 아니? 그건 바로. 바로. 거의 매일같이 네게 편지를 썼는데 오늘은 피곤해서 하루 빼먹으려 했는데... 바로 그거더라구. 네게 편지 쓰는 걸 빼먹은 거. 섭섭하기도 하구. 그래서 이렇게 자려다 말구 다시 일어나서 또 편지를 쓴다.

오늘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왜인지는 나두 잘 모르겠어. 나도 내 마음을... 왜 기분이 나쁜지... 정말 꿀꿀한 하루야. 답답하고 울고 싶고... 널 볼 수 있으면 쪼끔은 괜찮아질 거 같은데...
왜 있잖어. 너 생각나? 내가 양재동에 이력서 내러 갔다가 한 시간 기다리구 비 맞고 왔었을 때였지, 네가 위로해 줬었잖아. 생각나니? 안 나두 할 수 없지만. 암튼 내가 이 얘기를 왜 하냐면 그때 정말 속상했던 맘과 서글펐던 내 맘이 너로 인해 굉장히 가뿐하고 좋아졌었거든. 지금도 네가 곁에 있다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해서... 이런 날은 누군가가 어깨를 빌려준다면 펑펑 울고 싶어. 왠지 혼자 우는 건 처량해 보이잖아... 그래서... 난 또 무슨 생각을 이렇게 골똘히 하는지...

그래, 난 이렇게 생각이 많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사는 것 같다고 말들 하더라. 그래두 철아 너는 알지? 내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걸. 기분이 좀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무슨 말을 써야 하나? 참. 내가 재미있는 얘기 써줄까? 얼마 전 통신에서 본 건데. 욕 들어가는 얘긴데 해도 되겠지?

어느 농가에 닭이 3마리 있었다. 복날이 다가오자 주인은 어떤 닭을 잡을까 고심하다가 마침내 제일 머리 나쁜 닭을 잡아먹기로 했다. 그래서 세 마리의 닭 중 첫 번째 닭에게 물었다.

주인 : 1+1은?   
닭 1 : 꼬꼬댁 꼬꼬댁
주인 : 똑똑한 것.

다음 두 번째 닭에게
주인 : 1+0은?
닭 2 : 꼬꼬댁 꼬꼬댁 꼬꼬댁 꼬꼬댁
주인 : 음... 역시 똑똑하군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닭에게 질문했다.
주인: 34985 x 13586?
닭 3 : *새꺄! 물 끓여.

내가 너무 리얼하게 썼나(욕을) 재밌니? 혹. 아는 얘기야? 그래두 좋지? 혼자 위안을 삼으련다. 네가 재미있어했을 거라구. 또 고마워두 했을 거라고... 그리구... 지금 방금 번개. 천둥. 우와! 무섭다.

.......

근데 너 혹시 물갈이 같은 거 했어? 서울물과 달라서 배탈이 났다거나 또는 음식이 입맛에 안 맞는다거나...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러더라구. 음식 때문에 물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 그리고 생각해 보니깐 밴드를 너무 늦게 보내준 거 같애. 그거 군화 땜에 발이 까져서 부쳐준다고들 하던데 난 거의 상처가 나을 무렵에 그러니까 4주째 되던 때 보내줬지?
또 천둥 친다. 무서워 잉~ 어떡해. 나 그만 자야겠어.
이럴 때는 옆에서 누가 같이 잤으면 좋겠는데... 언니나 동생이라두 있으면 좋았을걸 말야.
나 정말 무서워서 그만 자련다.


1998. 8. 7.

P. S. 형한테 편지 쓸 때 내꺼두 써서 부쳐.
       형보고 전해주라고 하믄 되잖아. 내가 가서
받아오던가!
       힘든 일이겠지? 그냥 헛소리해봤어.   
       그럼 너두 잘 자.



과도한 말줄임표...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답답한 심정이 전해진다.

우울함 속에서도 짧은 만남 중에 나로 인 위로받았던 기억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그녀. 크거나 지는 못하더라도 그 맘속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스스로의 기분 탓으로도 떠올렸을 재미있는 이야기, 내용은 재미있지만 군대라는 곳에서 읽은 삼철 훈련병은 오히려 마음이 더 쓰였을 것 같다.


밝지 못한 편지의 내용이지만 나를 많이 생각하고 걱정해 주는 그녀의 마음이 따뜻하다. 입대 전 딱 한번 형과 얼굴을 마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편지를 보내면 그런 그에게 가서라도 받아 오겠다는 그녀가 고맙고 또 귀엽다.



그런데 말입니다.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지 말입니다.


'이럴 때는 옆에서 누가 같이 잤으면 좋겠는데... 언니나 동생이라두 있으면 좋았을걸 말야.'


비가 오고 천둥이 치니 가뜩이나 겁 많은 그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긴 하나, 언니나 동생이라두? 이라두??? 이라두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통상 이라도는 '더 좋은 것이 있는데 아쉬운 대로 그럭저럭 괜찮다'라는 의미로 쓴다. 내가 노파심에서 국어사전도 찾아봤다.


사전에는 그것이 썩 좋은 것은 아니나 그런대로 괜찮음을 나타내는 보조사. 그것이 최선의 것이 아니라 차선의 것임을 나타낸다. 이렇게 쓰여있다.


천둥번개가 쳐서 무서운 날 없는 언니나 동생과 함께 잘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지 썩 좋은 것은 뭐람? 엄마, 아빠가 그 대상은 아닐 나이일 뿐 아니라 부모님은 함께 계셨다. 썩 좋은 것이 부모님이라면 가서 같이 자면 될 일이다. 하나뿐인 오빠? 현재는 사이가 좋지만 오빠가 결혼하기 전까지 죽도록 싸웠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말한 썩 좋은 것, 최선, 더 좋은 것은 가족 이외의 사람과의 동침을 지칭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글은 말과는 다르다. 어느 정도 정제된 생각이 정리된 표현으로 기재되는 것이다.


얘 봐, 얘... 이 아가씨 큰일 날 아가씨네... -_-

물론, 그 대상이 나라면 아주 바람직하다. 입대 전 만남의 시간이 짧았고 깊은 사이도 아니었기에 무척 자신이 없긴 하지만...

만약 내가 아니라면 이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처절하게 "물 끓여"를 외친 닭 3에 버금가는 비장한 심경으로 아내에게 물었다.


답변은 이렇다.

"그때가 언젠데 생각 안 나지..."   이런... -_-


이에 굴할 내가 아니다.

기억과 기술을 더한 추가 답변은 이랬다.


정말 밤을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이럴 때 나와 같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

나에 대한 그저 막연한 그리움이 은연중에 표현된 것이라고 한다.


사전 배경설명 및 유도신문 등 우여곡절 끝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애써 이끌어낸 현답이다.



어쨌거나 이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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