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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와샐리 Feb 14. 2024

만들고 싶은 식단 리스트를 작성했다.



나는 집 냉장고를 거의 들여다보지 않고 살았다.

특별하게 좋아하는 음식도 없고, 엄마가 주는 대로만 먹고 엄마가 꺼내달라는 것만 꺼내드리는 그런 수동적인 딸이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난 뒤에는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굶어야 한다.

배달음식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기 때문에 배달음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결혼 전 1년간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소소한 요리를 시작했고 재미도 느꼈다.

결혼 초반에도 역시 재밌게 요리를 했다.

내가 무기력에 빠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 시간을 보내며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 쌓여가는 식자재를 보니, 요리를 안 해 먹은 건 아니지만 '최근 내가 게을러졌구나'를 깨달았다.

엄마가 챙겨준 초록초록하던 시금치 반찬이 점점 카키색으로 변하가고 있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김치에 곰팡이가 생겼다.

김치에 핀 곰팡이를 보니 이거 정말 아니다 싶었다.

집 냉장고를 한번 싹 해치우기로 결심했다.

남은 재료들을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본다.

'남은 애호박으로는 찌개를 만들 수 있겠군.'

'냉장고에서 말라가고 있던 버섯을 냉동실에 꽝꽝 얼은 불고기에 넣어 먹어보자.'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닭가슴살은 카레에 넣고.'

'남은 반찬들은 다 모아서 비빔밥으로 만들어 볼까?'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달걀들은... 달걀말이로 한 번에 먹어버리자.'

'유통기한 지난 어묵은 어묵볶음이랑 어묵탕으로 해치워!'

냉장고의 재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만들 수 있는 게 꽤 된다.

그리고 만들 생각을 하니까 또 요리할 생각에 재밌어진다.

일단 유통기한 지난 것들을 먼저 해치워야 할 것 같아서 오늘 선택당한 재료는 '어묵'

맘먹고 뚝딱뚝딱 요리를 만들어본다.

엄마가 준 다시마 2장에 무와 파를 넣고 거기다가 어묵까지 넣고 끓여내니 어묵국이 뚝딱 만들어졌다.

오 굿.

다음엔 어묵볶음 도전!

남은 어묵들을 검색한 레시피에 따라서 슥삭 볶아낸다.

오 비주얼이 제법 그럴듯한데?

맛을 보니 비주얼뿐만 아니라 맛도 그럴듯하다.

한 끼를 차렸는데 또 자존감이 급!!!!! 상승했다.

남편이 사진을 찍어 가족 단체 톡방에 자랑을 했다.

남편은 종종 우리의 밥상을 찍어서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도 올리고, 우리 가족 단톡방에도 올리곤 한다.

쑥스러워서 친구들 단톡방이 너의 SNS냐고 남편에게 말은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랑하는 것 같아서 꽤 기분이 좋다.

부모님은 아직도 내가 차려 먹는 상이 조촐하다곤 하시지만 그래도 뿌듯하다.

내가 차려낸 밥상이라니!

거기다가 오늘은 냉장고에서 잠자고 있던 재료를 활용해서 요리를 해냈다.

음식물 쓰레기가 될 뻔한 것을 음식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뿌듯이 또 배가 된다.


이렇게 또 하나 발견했다.

나의 무기력을 없애줄 새로운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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