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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재 Dec 21. 2021

기사님, 안녕하신가요

눈길


며칠 전 서울에 눈이 왔다. 펑펑 오는 눈은 오랜만이었다. 창문을 여니 피부가 아리게 날씨가 추웠다. 그래서 그날은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책임지며 살아야 할 것이 별로 없는 나의 첫눈을 본 소감은 그뿐이었다. 날씨가 많이 춥네.



눈은 이삼일을 녹지 않고 길을 질펀하게 만들었다. 어제는 일정을 마치고 언 몸을 녹이며 늦은 밤에 귀가를 했다. 그러곤 내일 일정도 없겠다, 같이 사는 친구와 치킨을 주문했다. 그런데 1시간이 넘도록 배달이 오지 않았다. 가게에 전화를 해서 물어봤더니, 배달이 많이 밀려서 기사님이 늦으시는 것 같다며 확인해보겠다 했다. 그런데 그 전화를 끊자마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기사님이셨다.



"안녕하세요, 지금 배달을 가는데 거기까지 1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서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눈길에 운전을 하다가 넘어졌는데, 안에 내용물은 아무 이상 없습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네? 넘어지셨다고요? 많이 다치셨어요?"

"아, 가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지긴 했는데 많이 다치진 않았습니다. 방금 내용물 확인했는데 음식은 다 괜찮아요."

"아... 기사님 음식은 상관없습니다. 조심히 천천히 오세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실제 전화에서 기사님은 몇 번이고 더 죄송하 다하셨고, 조심히 천천히 오시라는 내 말에 몇 번이고 더 감사하다 하셨다. 점점 마음은 이상해지고 머리는 복잡해졌다. 전화를 끊은 그대로 멍 때리고 앉아 이 찝찝하고 괴로운 마음이 뭔지 생각에 빠져있었다. 잠시 후에 친구가 왜 그러냐고 물어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때 아니게 나왔다. 영문을 모르는 친구 옆에서 소리 내서 몇 분을 울었다. 울면서도 내가 왜 우는지를 모르겠어서 계속 생각했다.



서비스직 종사자나 배달, 택배기사를 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뉴스를 우리는 심심찮게 듣는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어떤 비슷한 분노가 인다. 경제적 위치로 사람의 계급이나 위계를 결정지으려는 본성은 천한 본성이다. 인간성은 자본주의의 편협한 언어로는 번역되지 못하는 고귀함을 지닌다. 내가 기사님과의 전화에 눈물이 나온 이유는, 그깟 치킨을 시킨 나한테 필요 이상의 사과와 감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눈길에 다치셨다는 말에 대한 나의 당연한 반응에, 너무나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셨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 당연한 대우를 받지 못하셨을 기사님의 하루들이 마구잡이로 상상이 됐다.



친구가 치킨을 받으러 현관에 나갔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운 게 창피해서 한 발치 뒤에서 기사님과 인사를 했다. 40대 정도 되어 보이시는 남자 기사님이셨다. 복슬복슬 따뜻한 수면잠옷을 입은, 새파랗게 어려 보일 20대의 우리에게 기사님은 무릎에 손을 얹으시면서 고개 숙여 감사하다고 인사하셨다. 우리는 고개 숙이며 밑에 내리막이니 눈길 운전 조심히 하시라는 말 밖에 마지막으로 내어드릴 말이 없었다.



이제 음식을 먹으려고 앉아서 휴대폰 시간을 보는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무심코 확인했다. 짧은 두줄의 문자를 한눈에 읽어버리고 어떻게 진정시킨 마음에 다시 미어지는 파도가 쳤다. 치킨을 앞에 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또다시 울었다. 아무래도 나는 앞으로 첫눈이 내릴 때면 오토바이가 지나다닐 길의 안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눈이 펑펑 오고 난 뒤 조금씩 녹기 시작할 때쯤, 길에 검은 질펀함과 하얀 소복함이 섞일 때쯤에는 어제의 기사님의 안녕이 궁금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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