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02

나는 가끔 ‘나’라는 것이 정말 실체가 있는지 의심한다.

by 쏴재

이전 글(아래 참조)에서 처럼, 자의식이나 나의 본질이라는 것은 어쩌면 '진화의 흔적과 뇌 전체의 네트워크가 작동하면서 만들어내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손에 쥘 수 있는 단단한 물건이 아니라, 손을 뻗는 순간 흩어지는 불꽃 같고, 형태를 갖추지 않은 파도 같고, 잡으려 하면 이미 사라져버린 공기 같다.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끊임없이 변하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도 않는다.


내가 상상하는 뇌 속의 네트워크는 대지 위에 새겨진 '강의 지도'와 닮아 있다. 아마존강이나 양쯔강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거대한 물이 쏟아지듯 흐르는 강이 있는가 하면, 그랜드 캐니언처럼 과거에만 강이 흘렀던 흔적만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심지어 화성 표면에서 발견되는 말라버린 물길처럼, “여기에도 한때는 흐름이 있었구나” 하고 짐작만 할 수 있는 자리도 있다.


뇌도 그렇지 않을까. 한때는 아주 강하게 흘렀던 생각, 감정, 반응의 경로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약해지고, 다른 길이 새로 만들어진다. 이것을 '뇌 가소성' 이라고 부르는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는 큰 강이던 생각이 지금은 지류가 되거나 말라버리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물길이 트이는 것. 점과 점을 잇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점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의식이나 인식의 변화는 ‘이해’만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체득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보자.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이 불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공황이 올 때 내 몸이 즉시 안정을 찾지는 않는다. '이건 위험하지 않아'라는 정보는 알고 있지만, 뇌 속 네트워크는 여전히 ‘위험’이라는 옛 경로로 물을 흘려보낸다. 그래서 변화는 기존의 구조를 우회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선택한 방법 중 하나는 달리기였다. 달릴 때 심장이 세게 뛴다. 하지만 그때의 심장 박동은 두려움이 아니라 활력과 연결되어 있다. 반복해서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심장이 빨리 뛰는 감각이 '불안'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좋은 신호'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특히 이미 '천천히 달리는 것은 나를 안정시키는 행위'라는 긍정적인 과거 경험이 쌓여 있다면, 이 변화는 훨씬 수월하다.


아래에서 말할 할 조금 복잡한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가소성은 선택과 집중의 결과이며, 선택했더라도 역치를 넘지 못하면 결국 무감각해져서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다시 강의 비유로 돌아가 강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중 하나의 길만 선택하려면, 다른 한쪽은 점점 물이 줄어들어야 한다. 일정 시간 동안 한쪽으로만 물이 흐르면, 다른 길은 어느새 말라버린다. 충분한 체득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더 이상 선택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몸과 마음이 이미 한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흐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변화 없이 지속되는 정보는 오히려 인식되지 않는다. 이건 감각 박탈 실험에서 잘 드러난다. 향수를 처음 뿌리면 냄새가 강하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화장실 냄새도 마찬가지다. 냄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뇌가 '더 이상 새로운 정보가 아니다'라고 판단해 무시해버린 것이다. 시각도 그렇다.각막을 고정한 채 단순한 흑백 문자을 계속 보여주면, 시각 정보는 점점 흐려진다. 그래서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 눈은 아주 미세하게 끊임없이 흔들린다. 새로운 자극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이런 현상은 오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뇌에는 지금 이 순간의 감각뿐 아니라 수많은 기억이 동시에 들어온다. 1분 전의 장면, 수십 년 전의 기억, 원하면 꺼낼 수 있는 기억, 원하지 않아도 갑자기 튀어나오는 기억들. 이미 지나간 말 한마디, 끝난 관계, 그때 하지 못한 선택들이 어느 날 불쑥 나를 붙잡는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집착과 고통은 어쩌면 내가 계속 선택해온 정보의 결과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작은 실험을 해보았다. 감각 박탈처럼, '의식정보도 받아들이는 수준을 낮출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고, 의도적으로 생각의 수준을 낮추면 정보의 양과 세기가 줄어들지 않을까?

첫 번째 방법은 이랬다. 눈을 감고, 엄지와 검지를 천천히 비비며 그 감각만 느낀다. 판단하지 않고, 의미를 붙이지 않고, 정보를 해석하지 않는다.

두 번째 방법은 호흡이었다. 눈을 감고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감각에만 집중한다. 역시 어떤 생각도 붙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쉽지 않았다. 눈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흔들리듯, 몸의 감각도 끊임없이 들어온다. 생각 역시 멈추지 않는다. 다만 가끔, 그 정보의 강도가 낮아지는 순간이 있었다. 아주 미세한 감각에 집중하다 보니, 오히려 그것이 커다란 감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0분 정도 이 실험을 마치고 나서, 나는 이상한 변화를 느꼈다.

오감이 조금 더 선명해졌고, 생각이 전보다 맑고 새롭게 느껴졌다. 폭과 깊이가 줄어버린 강에 다시 물이 많이 흐르기 시작한 것처럼.


아마 그랬던 것은 아닐까.

완전히 멈출 수는 없지만, 잠시 흐름을 늦출 수 있는 방법이였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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