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장대비가 쏟아졌다
머릿속에 있던 글자들이 빗물에 쓸려갔나
빗물 위에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초등학교 하굣길 우산 든 아이들 뒤를 따라 걷다
하늘에서 보면 알록달록하겠다는
꼬마의 웃음소리가 빗물에 통통 튀겨 내게 온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바람이었나 바램이었나
잃어버린 글자들은 나뭇가지에 걸쳐 있었고
모퉁이 붉은 장미 넝쿨 위에도 있었지만
비 오는 잿빛 하늘이 너무 쓸쓸해서
빗방울 맺힌 장미꽃잎이 너무 찬란해서
차마 담아 올 수 없었다
시가 내게 말을 걸어와도
바람으로 자꾸만 나를 불러도
모른 척 지나가야 했다
빗속을 지나 언덕길을 오를 때
키 작은 단풍나무 옆 갈라진 보도블록 틈에
이름 모를 풀꽃 하나가
바람에 빗방울을 털고 있다
나는 글을 잃어버려서
풀꽃에 이름을 얹지 못하고
그저
발끝에 힘을 주고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