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공동집필] 고마운 일상 D. 나 자신_ 질문 16.
A) 즉각적인 반응 / 솔직한 몸 / 약 빨 잘 받는 나!
내 병의 이름은 ‘MDS :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이다.
14년 전인 2011년 봄, 알 수 없는 두통과 이명으로 병원을 찾은 나는 혈액검사 결과 이 병이 의심되었고, 충북대학교병원에서 골수검사를 받았으나 확진되지 않았다. (당시 교수님은 어느 부분에서 뽑느냐에 따라 검사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상한 말을 하셨다.. ㅎㅎ)
지속적인 경과관찰이 필요하다고 했으나 갈 때마다 혈액검사만 하는데도 수십만 원이 드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실비보험이 없었음) 오히려 병원에 갈 때마다 머리가 더 아파서 1년 반정도 다니다가 그냥 가지 않았다.(그러나 이후 점차 잇몸출혈이 잦아지는 등 많은 증상들이 시작됨)
결국 2014년 가을, 급성 장염으로 응급실에 가게 되면서 혈액수치가 바닥을 친 상황에서 확진되었고(충북대학교병원에서 확진 후 이식병동이 없어 서울로 병원 서칭 - 처음 의심될 시기에 못 미덥기도 했고.), 많은 검색 끝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 병만 전담하여 보셨던 지금의 교수님을 찾아 서울로 다니게 되었다.(지금은 제자분 몇 분 더 생겨났다고 들었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병은 발견한다고 확진한다고 해서 바로 치료에 돌입할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병’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라
‘증후군’으로 붙인 것만큼 case by case였고,
원인도 알 수 없음(그나마 확신을 하며 말하는 것은 ‘스트레스’ 정도), 치료법도 완치를 위한 방법은 조혈모세포이식 (이전에는 골수이식)뿐인데 그 조차도 100퍼센트 완치의 확률은 아니었다. (30프로 완치, 30프로 재발, 30프로 사망이라고 설명 들었는데 10프로는 뭘까? 그게 아마 알 수 없는 이 병의 본질일지도.)
완치와 재발 확률 사이 기준도 뚜렷하지 않다.
(이 병을 오래 겪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정말 숱한 역경에도 ’희망‘ 이 되어 살아냈지만
10년 후에도 재발하여 바로 가신 분도 있으니)
쉽게 치료의 종류와 시기를 선택할 수 없고(교수님의 선택도 환자의 선택도 아니고 몸의 검사 결과를 토대로 모든 종합적인 타이밍을 기다려야 한다.),
그저 그때마다 몸 상태와 상황에 대처하며 끊임없이 타이밍을 살펴 선택해야 했다.
나의 경우에는 진단부터 이식까지 1년의 시간이 흘렀다.(1년이 기약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얼마 후 치료 가능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시간을 보냄)
결혼을 준비하던 상황에서 확진되어 깊은 답답함과 불안 속에(‘아이’에 대한 남다른 마음 때문에 더욱 힘든 고민과 선택과 준비 사이에서) 1년을 보냈다.
물론 준비와 고민 시간도 없이 목숨이 위험해 선택의 기회도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어쩌면 나의 경우는 감사한 기회이기도,
그렇지만 생각보다 끊임없이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받아들여야 하는 선택의 결과 사이에서 어떤 선택이 덜 괴로울 것인지를 재고 따져야 하며,
그 조차 나의 온전한 결정으로만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잔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정신건강증진센터를 가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시간이었다는 것만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한다.
한없이 상태가 악화되기를 기다리는 시간,
차악의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
그리고 마지막일지도 몰랐기에
후회 없는 순간을 보내는 시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그렇게 오래지 않게,
그러나 어느 정도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이식의 날을 맞이했다.
그렇게 3년과 1년 그리고 이식 후 약 10년,
나는 약 14년째 이 병과 함께하고 있다.
1년의 시간이 지나 이식을 했고
10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병에는 완치가 없다고 봐야 한다.
‘재발’이 일어날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발병원인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물론, 급성으로 떠나게 되는 재발은 보통 3년을 전후로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다.
주기적으로 혈액수치의 변화를 관찰하며, 그날그날의 증상들을 매일 끊임없이 관찰하고 나의 몸이 말하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말 다행인 것은, (고로 감사하는 것은)
바로 내 몸이, 아주 솔직하다는 것.
나는 바로바로 상태가 보였다.
괴롭고 힘들어하던 순간은 아침마다 피떡으로 덮인 입안을, 온몸을 덮은 두드러기로 보여주었고,
항암을 시작했을 때에도 방사선을 했을 때에도, 예상한 반응들이 바로바로 알람을 울려대듯 증상이 나타났다.
아픈 것도 그러한데,
그 솔직한 몸 덕분에 나는 약에도 바로바로 반응을 했다. (컨디션 조절에 힘쓰는 것도 바로바로 티가 남) - 항암과 방사선 당시 ‘진통제’와 ‘진토제’의 소중함을 깊이 느꼈던 이유.
지금도 마찬가지로, 조금만 무리를 하면 몸에서 바로 반응을 하며 경고를 한다. (지난 1년의 시간이 아마 이식 후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시기였던지라 재발의 위험을 가장 크게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느리고 예민한 병 덕분에(?) 나는 바로 사달이 나지는 않고 있다. 다시금 스스로에게 소홀해진 나를 반성하고 다시 들여다보며 나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시간을 선물 받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의 병으로 알게 된 환우 언니들과 셋이 쪼르르 하루 종일 수혈을 받으며 병원 외래를 끝내고 터미널의 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로또’를 산 날의 이야기다. )
“진단되고 처음 검색해서 바로 산 책에서 봤는데, 우리의 병이 10만 분의 1의 확률이래요.”
(책을 다시 한번 꺼내 읽어보니, 평균 연령은 60대 이고, 여자보다 남자가, 벤젠과 같은 독성물질에 고용량으로 노출된 경우, 다른 암으로 항암과 방사선을 받은 경우, 그리고 흡연자가 발병확률이 높다고 한다. 정말 나는 어떤 것에도 해당사항이 없는데 말이다. ㅎㅎ)
엄지언니(하이파이브)가 말했다. ”우린 로또 걸릴 확률보다 높은 확률의 여자들이네! “
중지언니(하이파이브)가 말했다. “어떻게 이 확률을 여기다가 썼을까? ㅎㅎㅎ”
새끼손가락(하이파이브)인 내가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병에 걸린 건 선물일지도 몰라요.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로또일지도. 왜냐하면 우리가 아픈 이 경험으로 인해 남들은 알지 못하는 정말 귀하고 소중한 생각들을 하며 살아갈 수 있잖아요.
아마 우리가 이 나이에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의미 없는 삶을 지금도 그리고 오랜 시간 살고 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무엇이 삶에서 중요한지, 소중한지,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우린 이 병에 걸렸기 때문에 알 수 있었잖아요. “
그렇다.
내가 지금 어떤 건강상태를 가지고 있건,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내가 얼마나 감사한 상태인 건지.
그렇기에 오늘도 스테로이드 연고에 바로 가라앉은 두드러기에게 고맙다.
잠을 잘 자고 나면 괜찮아지는 이명에게 고맙다.
요가를 하고 나면 한결 나아지는 목어깨에 고맙다.
죽염 가글을 하고 나면 조금 나아지는 목감기에게 고맙다.
약하디 약한 이 몸으로도 비티만을 잘 챙겨 먹으며 일을 잘 해낼 수 있게 해주는,
이 병의 적당함에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무사히 보낸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솔직한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서 이식 후 예후가 다른 환우들보다 훨씬 좋았고, 지금까지 큰 이벤트 없이 10년째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확신이 잠시 좌절로 이어졌던, 이식 9년차
지난 12월 외래의 내 마음 풍경 글귀처럼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라 희망하고 자신해 보고 싶다.
남은 내 삶에 기적과 기쁨만 가득하도록.)
이런 몸과 마음을 가진 나에게,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낀다.
앞으로도 늘 그런 나로, 하루하루 의미 있는 삶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ps. 그러고 보니 다시 투병일지를 쓰면서, 글을 쓰면서부터 잇몸출혈이 줄었다. 한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잇몸출혈이 계속 심해져 갔었는데 말이다. 역시 나를 꼼꼼히 챙기며 돌보니 즉각적인 반응이 온다.
정말 감사한, 솔직한 몸이 아닌가.
- 그래서 요즘 밥을 잘 챙겨 먹었더니 빠졌던 살이
고대로 다시 원상 복구되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행복한 꿀꿀쏘로 살아야 하나보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