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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Jan 31. 2019

언제쯤이면 아빠를 떠올릴 때 담담할 수 있을까

일상의 흔적 23

1월 31일, 나중에 몰려올 추위가 불안할 만큼 따뜻한 날씨. 아빠가 꿈에 나왔다.

아빠는 종종 꿈에 나와주었다. 마치 잘 지내고 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가만히 있거나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그날의 일상을 함께 보내곤 한다. 그렇게 꿈속에서 본 아빠와는 반갑고 기뻐서 내내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막상 깨고 보면 눈가에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곤 하다. 꿈을 꾸는 동안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내 몸은 아직 슬픔을 떨쳐내진 못했나 보다.


아빠는 누구보다 더한 딸바보였다. 투박한 센스를 가져 딸 취향을 모르는 엄마를 대신해 항상 내 옷을 사고 씻고 나면 머리를 말려줬다. 흘리듯 말한 간식을 기억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 꼭 간식을 사 왔다. 어느 겨울에는 곶감이 먹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일하러 가던 길에도 차를 빙빙 돌려 샀다고 한다. 하지만 옛날 사람, 경상도 무뚝뚝한 아저씨답게 늘 표현에 서툴렀다.


서투른 표현에도 사랑을 느꼈다. 나 역시 아빠를 닮아 무뚝뚝한 딸이었기에 우린 비슷한 서로를 이해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따뜻함을 느꼈다. 아빤 처음으로 곁을 떠나는 어린 딸을 걱정했었다. 평생을 옆에 두고 싶다는 말을 돌리고 돌리면서도 답답한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딸을 응원했다. 가끔 다른 일로 부산에 올 때면 몰래몰래 집에 필요한 물품을 넣어뒀다. 그래서 평생 내 옆에 있을 줄 알았다. 누구보다 활동적이고 건강했던 아빠의 아픈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빠는 희귀암이었다. 국내에서도 딱히 치료법이나 약이 없고 더구나 제주도에서는 정확한 암의 이름조차 모르는 의사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젊고 건강한 몸은 암세포의 진행 속도를 더 빠르게 했다. 아직 완전한 약이 아님에도 어쩔 수 없이 개발 중인 약을 복용하거나, 마약성분으로 만들어진 진통제만이 아빠의 허물어지는 몸을 지탱해주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늘 유쾌했다. 틈이 나면 엄마와 여행을 떠났고 더 자주 나에게 표현했고 지인들을 만나며 허투루 시간을 쓰는 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 유독 나에게 제주도로 내려오라고 고집을 부렸다. 아빠의 감이 었을까, 그 해가 마지막으로 같이 보내는 1년이었다. 1년의 시간은 우리 가족에게 슬프지만 즐거웠던 시간으로 기억됐다. 종종 해외로 여행을 떠났고 제주도 곳곳을 다녔고 부모님의 커플사진을 가득 찍어두었다. 우리에겐 행복한 미래만 있다는 듯 그렇게 살았다.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도 현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장난이라며 씩 웃을 것 같았고, 미동 없는 아빠를 바라보며 숨을 쉬는 듯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환각을 보았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죽음에 익숙한 듯 냉정하게 사망선고를 내리는 의사도, 먼 곳에서 오느라 아빠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던 가족들도, 그 순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나 자신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아빠가 원하는 산 높은 곳, 제주도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나무가 된 아빠를 보면서도 현실과 꿈을 구분 짓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 편하게 슬퍼할 여유가 없었다. 나보다 더 메말라가는 엄마를 지켜야 했다. 난 어떻게든 씩씩한 딸이어야 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화를 나누고 엄마가 잠든 후에야 이불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삼켰다.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아빠가 떠올랐다. 처음엔 길에서 비슷한 사람만 봐도 등을 돌리고 주저앉았다. 누군가 딸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다 무너진 얼굴로 아빠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침대에 누워 같이 웃던 TV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울었다. 겨울이면 뿌듯한 얼굴로 사 오던 붕어빵이 생각나 몇 년 동안은 먹지 못했다. 매일 매 순간 떠오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잘해주지 못한 것만 떠올랐다. 아빠를 실망하게 하거나 서운하게 한 순간이 떠올라 후회로 얼룩진 마음을 안고 살았다.


여전히 아빠가 그립다. 누군가 아빠에 대해 물으면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담담한 척 웃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꾹꾹 누르던 그리움의 스위치가 켜지는 날엔 동그랗게 몸을 말고 혼자 슬픔을 다시 삼켰다. 누구에게도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종종 참을 수없을 만큼 그리움이 몰려올 때면 그날의 내가 되어 이불속에서 울음을 토해낸다.


하지만 이제 나도 단단해졌나 보다. 꿈에 나와서 처음으로 편하게 나를 보고 웃어주는 아빠를 보았다. 꿈에서 깼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나에게 이젠 아빠가 떠오를 때면 웃어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아빠는 자유로운 바람이길 원했다. 전국을 떠돌며 이곳저곳을 보고 싶어 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음껏 자유롭게 돌아다녔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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