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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Su Apr 16. 2023

사람에게도 무늬가 있다

 기대수명이 100세를 거뜬히 넘길 거라는 이야기가 이제는 놀랍지도 않게 너무나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요즘이다. 며칠 전에 읽은 김미경 강사의 <마흔 수업> 책에서 40대는 세컨드라이프를 시작하는 나이라고 했다. 

무작정 달려온 제1의 인생이 끝나가고 새로운 제 2의 인생여정을 준비해야 할 시기라는 것.

 정작 '나'란 사람은 내려두고 가족을 위해 달리고 버텨온 세월의 중간에서, 잠시 허리를 펴고 큰 숨 한 번 들이마시게 되는 그런 나이. 

뭐 하나 제대로 해 놓은 것 같지 않고,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멀디 멀고 막막해 보이기만 하니 가슴을 퍽퍽 내리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시기. 

남들 이룬 것들을 보며 비교하고 쓰라리기도 여러 번, 사랑스러운 가족들에 힘내서 웃다가도 쓰디쓴 맛으로 입꼬리가 내려가고야 마는 시기이다. 나의 제 2의 인생은 도대체 어떻게 꾸려나가야할까를 생각하다 문득 나의 지나온 흔적들을 떠올렸다. 


 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겪어온 일련의 사건들과 경험들이 어우러진 총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은 환경과 경험들이기에 단 한 사람, 그 어느 누구와도 일치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두루뭉술하니 명확하지 못했던 '나'란 사람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글 안에서 비치는 '나'란 사람에 대해서 믿음이 가질 않는다. '어떤 사람'이라 단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내가 나에 대해서 대표적인 몇 마디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가끔은 크나큰 좌절이 된다. 마치 아무것도 갖지 못한 無의 형태인 것만 같아서, 안간힘을 써 붙들어 놓고 있는 평범 이하인 자존감마저 놓쳐버릴까 봐 겁이 날 때도 있다. 


 언제쯤이면 내 글에서 명확하게 '아, 이건 나야'라고 알아차릴 수 있을까.

어쩌면 본디의 나를 숨기고자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나 자신 같지 않은 이미지를 만들어 '척'하는 인생으로 스스로마저 속이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어 면구스럽다. 


내가 좋아하는 정지우 작가는 '내가 쓰는 글이 나를 진실로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글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 내가 쓰는 글들은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 쓰는 글임이 분명함에도 나는 한 글자 한 글자를 타이핑 할 때마다 마음이 저릿하다. 덩이진 무언가가 속에서 밀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에 힘이 들 때도 있다. 다시 내려놓고 그만둬버릴까 하는 마음도 불쑥불쑥 들곤 한다.

 부지런히 마음을 글로 옮겨 담지 못하는 이유다. 드문드문 드러내는 나의 글은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끄집어내는 마음의 한걸음이다. 


'삶'은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에게 흔적을 남긴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견뎌온 세월만큼의 흔적을 또렷이 남긴다. 깊이 푹 패인 생채기가 있기도 하고, 곱지 않은 새 살로 뭉텅이진 흉도, 지지 않는 퍼런 멍도 있을 것이다. 웃음만큼의 주름도 어딘가엔 곱게 져 있을 것이고, 마르지 못한 눈물 자국도 있을지 모른다. 

각자의 주어진 환경에서 부단히도 애썼을 흔적들일 것이다. 지우고 싶은 무늬도 있겠고, 영광스러운 무늬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온 인생을 겪어내고 난 후의 마지막의 모습에서, 각자인 모두는 아름다운 무늬를 가졌으리라 감히 생각해 본다. 


각각의 무늬들은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고, 제멋대로일 수 있고, 때론 뾰족하니 다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무늬들의 총합은 다채로이 융합되어 '한 사람'을 말해줄 것이다.

마치 눈 결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 하나의 일치됨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무늬도 그러할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눈 결정이 없듯이, 모든 사람의 무늬는 아름다울 것이라 믿는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으랴. 매 순간을 꿋꿋하게 버텨내고 어떻게 새겨온 인생일진대...

버려질만한 실패한 무늬는 없다. 

오직 세상에 단 하나뿐인 독창적인 무늬일 테니 말이다. 


'사람'에게는 '무늬'가 있다. 


 매 순간 내게 각인되는 무늬들에 보다 신중하고 싶어진다. 

이왕이면 비틀어지지 않게, 너무 날카로운 모서리가 생기지 않게, 매섭게 삐죽 나온 선이 없도록.

이왕이면 둥글둥글한 무늬로... 나란 사람의 '전체'는 그런 무늬들의 조합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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