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중박(국립중앙박물관)이 근처에 있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들르는 편인데요. 가게 되면 항상 달항아리를 사진으로 꼭 담아올 만큼, 조선시대의 백자를 굉장히 애정 합다.
사실 현대미술이론을 전공해서 평소에 한국사를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던 제가, 이렇게 한국 도자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바로 2018년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개최되었던 구본창 사진작가의 개인전입니다.
좌- 2018 부산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구본창 작가 개인전 전경 우- 구본창 작가 ⓒ Kukje Gallery
참고로 구본창 작가는 도예가는 아니고, 한국에서 이미 대중적으로도 알려진 저명한 사진작가이시죠.
여기서 제가 '대중적'이라고 서술한 이유는, 작가님의 작업 초기에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다수의 대중영화의 포스터 작업도 참여하셨기 때문인데요.
대표적으로는 <태백산맥>, <취화선>, <서편제>가 있습니다.
영화 <취화선> 포스터
특히 영화 <취화선>에서 최민식이 술에 취해 술병을 들고 지붕 위에 올라갔을 것이란 아이디어도 바로 구본창 작가가 낸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완벽하게 반영해낸 포스터가 아닐까 싶어요~
자 그럼 오늘의 추천작인 작가님의 백자 시리즈를 함께 살펴보실까요?
직장을 그만두고 독일로 떠나 사진학도로 생활하던 어느 날, 구본창은 유명한 사진작가 스노든 경이 1989년에 촬영한 영국의 대표 도예가 루시 리의 한 사진에서 눈길을 멈추게 됩니다...
영국 도예가 루시 리(Lucie Rie, 1902-1995) ⓒ Philips Auction
바로 이 사진인데요, 이를 본작가는 조선의 달항아리가 어쩌다가 영국의 한 도예가의 집까지 건너가게 되었는지, 또 그녀가 제작한 수많은 도자기를 제쳐두고 백자 옆에서 촬영을 했을 만큼, 이를 뜻깊게 생각하고 있는지 호기심을 갖게 되죠.
그러던 와중에, 일제시대(구한말)에 조선의 백자를 포함한 많은 유물들이 해외로 많이 유출되었음을 알게 된 그는, 이미 다른 나라에 귀속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옛 오브제(유물)들을 사진을 통해 한국에 다시 들여와 가족상봉을 해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2004년, 그는 도쿄박물관을 시작으로, 국내외 16곳 이상을 방문하며 촬영을 진행하는데요.
미술관의 양해를 구하고, 오랜 시간 동안 유리관 안에서 보관되어왔던 조선의 백자를 꺼낸 그는, 평소 미술관의 전시도록에 실린 사진들과는 다르게, 일부러 조리개를 느슨하게 개방해서, 초점이 많이 나가 마치 허공에 피사체가 부유하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을 살려내죠.
또한 일반 사진이 아닌 회화성을 높이기 위해, 콘트라스트(대비)를 최대한 낮추고, 인공조명의 밝기와 공기 밀도를 최소화하기 위해 셔터를 누르는 즉시 사진이 생성되는 폴라로이드로 촬영을 진행하는데요.
작가가 2010년, 2006년에 진행한 백자 시리즈 ⓒ Kukje Gallery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눈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바로 위와 같은 피부색과도 같은 옅은 핑크색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을 인화하게 된 것이죠.
작가는 이를 통해 수백 년간 쇼케이스에 보관되어 있던 시간을 압축해 포착한, 현대적인 느낌을 살린 백자를 탄생시게 됩니다.
사실 독일 유학시절 그는... 저희가 알고 있는 바우하우스의 철학에서 알 수 있듯이 장식적 요소보다는 기능적 요소를 강조하는 사물의 본질을 중요시하는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따라서 당대 선인들의 일상의 용기였던 다양한 백자들의 온기를 담아내기 위해,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 백자의 존재 자체를필름에 담고자 했던 작가는, 이미지와 실체 간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먼저 백자의 바닥과 뒷배경에 한지를 깔아 사진을 한층 따뜻하게 연출합니다.
클로즈업하며 추상성을 강조한 2006년 흑백 Vessel 시리즈 ⓒ Kukje Gallery
또한 위와 같이클로즈업해서 추상적인 느낌마저 연출하는, 정말 그동안 조명받지 못한 백자의 가치를 예술작품으로 다시 승화시키는 것이죠~!
이러한 그만의 촬영기법을 통해 마침내 당시 도공이 만들었을 때 어떤 마음으로 제작했을지 느껴지는 깊은 울림이 담긴 작품을 담아냅니다.
오늘의 작품:
자! 그래서 오늘 저의 원픽 작품은요, 바로 구본창의 백자 시리즈 HA 11(2006)입니다.
오랜 인내 끝에 관객들과 마주한 백자의 모습을 보며, 바쁘다 바빠 현대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의뢰인께서도 잠시 동안 숨을 고를 수 있는 평온함을 선사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이 작품으로골라 보았습니다:)
HA 시리즈 중에서도 특히 아래 작품은, 작가님께서 백자 시리즈를 시작하신 2004년으로부터 얼마 안 된 초기작이라 더 뜻깊은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다른 반듯한 형태로 이루어진 달항아리들과는 달리, 좌우 모양이 균일하지 않고, 다행스럽게도 세척이 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 오면서, 세월의 흔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관객과 마주하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