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드 Jan 13. 2019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운 장면은 늘 숨어 있다

 ‘왜 살아야 하는 걸까?’ 이 질문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번 수술을 앞두고서는 모든 것이 지겨웠다. ‘수술을 하면 뭐하나. 어차피 또 아플 텐데.’ 지난 십 오년,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것만 차곡차곡 하고 있는 삶에 지쳐가고 있었다. 병원에 가면 수술 이력을 쓰는 칸에 자리가 모자라 주변의 여백에 수술 기록을 구겨 넣는다. 한 줄 더 수술이력이 추가되면 어디에 적어야 하나 생각하면서 쓴웃음이 나왔다.        


 아픈 채 나이의 앞자리가 두 번 바뀌면서부터는 종종 무력감이 찾아왔다. 삼십 대 까지만 해도 하루빨리 나아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힘든 재활도 치료도 불평하지 않고 다 참아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간절한 믿음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내 지식은 점점 무뎌졌고, 몸은 점점 삐걱거렸다. 이제는 이전에 걷던 길로 돌아가서 성큼성큼 걸어 갈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작년 9월 수술 후 재발을 막기 위해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서 부터는 신체의 노화증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에스트로겐이 끊기자 갱년기 증상을 고스란히 겪었다. 얼굴과 머리에 갑자기 열이 오르면서 등까지 땀에 흠뻑 젖는 날이 잦았다. 머리카락이 수시로 후두둑 빠지고, 단단했던 근육들이 흐물흐물해졌다. 피부도 탄력을 잃고 관절통과 근육통은 더 극성스러워졌다. 재발을 막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견디었다. 하지만 재발은 막지 못한 채, 호르몬 억제제 부작용인 노화증상을 고스란히 안고 다시 수술을 기다리고 있자니 억울한 감정이 밀려왔다. 얼굴이 아파서 관절과 근육과 뼈가 손상된 것이 회복되기도 전에 세월의 흔적까지 겹친 모습을 보니 서글펐다. 누리지 못한 젊음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기대가 무너지는 것보다 기대할 것이 없다는 자각이 마음을 무너뜨렸다. 돌아길 지점을 잃어버리자 구멍 난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의욕도 새어나갔다.          


 삶이 불행의 과녁을 향해 활시위가 당겨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조금 어긋난 것 같았지만 점점 더 각도가 벌어져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수술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정해진 기간의 육체적인 고통을 참는 것은 내겐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수술 전 검사에서 난소암 의심 소견이 나온 것도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이제 다섯 번 째 수술. 매 번 수술과 지루한 치료의 고통을 감수한 만큼 나아지지 않은 채, 다음 수술을 받아야 했던 과정이 누적되어 지쳐가고 있었다.           


 턱관절, 턱뼈, 근육 경직, 자궁, 난소. 다음은 뭘까. 이게 과연 끝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홀로 버려진 사람처럼 막막했다. 15년 이상의 시간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도 고작 이정도 밖에 살 수 없다면 앞으로의 미래도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닐까. 무엇이 되기 위한 고통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 무엇이 있다면 좀 나을 것만 같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고, 직장이 있고, 벌어놓은 재산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다시 돌아갈 무엇이, 지켜낼 무엇이 있었다면 이렇게 무력해지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삶에 애착을 가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반문하기도 하면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피검사 결과가 좋지 않았다. 정상이 0.3 이하인 염증 수치가 20이 넘어서 퇴원을 하지 못했다. 염증을 낮추기 위해 세 가지 항생제를 돌아가며 하루에 8번 맞아야 했다. 잦은 수술로 위가 약해져서 항생제 주사만 맞으면 위가 너무 아팠다. 가슴을 돌로 내리쳐 짓누르는 통증이 계속되어 밤 새 한잠도 자지 못했고 구토가 심해서 음식도 먹지 못했다. 위의 통증 때문에 수술한 배의 통증이 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항생제를 줄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음식 대신 암 환자들이 먹는 영양제를 수액에 연결해서 맞았고, 위장보호제와 구토 억제제가 추가되었다.     


 수술 후 늘 그렇듯, 근육 운동을 쉬면 급속히 굳어지는 근육들이 다시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등이 굳어지고 갈비뼈 근육과 목의 근육이 조여 왔다. 얼굴의 근육이 굳어지면서 턱과 코의 근육도 심하게 경직되어 아팠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병실 침대에 누워서 ‘사는 게 참 고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다.           


 그런데 옆 자리의 여자가 아직도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2인실 병실. 벽으로 두 침대 사이가 막혀 있어서 커튼으로 가려진 침실보다는 독립된 공간이지만, 사람이 오가는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 오후 3시쯤 수술하러 갔는데, 밤 10시 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 환자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결국 옆의 환자는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 환자의 남편이 다른 가족에게 전화하는 이야기가 벽 너머로 들렸다. 나도 모르게 모든 에너지가 귀에 집중되었다.     


 7살 막내딸을 둔 46세의 여자. 14cm의 자궁근종을 진단받고 복강경 수술을 진행하는 도중에 난소에 암이 발견되어 중간에 개복 수술을 했단다. 난소의 암이 대장과 혈관까지 전이되어 암을 다 제거할 수 없어서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수술 후 중환자실로 가서 병실에 돌아오지 못한 상황이었다. 수술 전 다른 병원에서 MRI를 찍었는데 자궁근종 이외의 난소에는 이상소견이 없었다고 했단다. 그렇다면 수술 예약을 하고 기다리는 3달 가까운 시간동안 난소암이 급격히 진행되어 다른 장기까지 전이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작년에는 갑상선 암 수술을 받았었다는 말을 들으며 병이 또 병을 부르는 그 안타까운 굴레에서 고통 받는, 얼굴도 못 본 그 사람이 참 가여워졌다.          


 이틀 후, 옆자리 환자가 방에 올라왔다. 수술 후 폐에 쌓인 마취약을 잘 뱉어내지 못했는지 밤새 기침을 했다. 수술 후 기침을 하면 수술한 자리가 당기면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는 걸 알기에 옆 사람이 기침할 때마다 나도 같이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아파서 기진맥진한 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옆의 환자를 위해 기도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옆 환자 기침이 멎게 해주세요. 그리고 암도 치유되게 해주세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저 사람의 고통이 조금은 가벼워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내 기도가 하늘에 닿아서 무엇인가 움직여 조금의 호흡이라도 편히 할 수 있길 바라면서.     


 나는 왜 살아야 하냐고 묻고 있으면서 그 사람이 살기를, 조금 더 쉬이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생명이란, 아픔이란 그게 누구의 것이라도 마음을 간절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너무 지쳐서 자신에 대한 간절함이 스러져 무너질 때도 있다. 그 때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들의 간절함에 기대고 업혀서 그 순간을 지나는 것이었다.     


 햇살이 창문으로 밀려들어오는 아침, 엄마가 병실 바닥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살짝 코 고는 소리도 들린다. 보호자가 머물지 않는 포괄간호병동이라 병실에 의자도 둘 수 없다. 집에서 작은 방석을 가지고 와서 깔고 작은 서랍장에 기대고 앉았다가 잠이 들었다. 이제 혼자서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으니 아침 일찍 오지 말라고 해도 구지 버스를 갈아타고 아침 7시 까지 와서 아침을 챙겨주신다. 그래서 많이 피곤했나보다. 집에서 내가 먹고 싶다는 김치찌개며 된장국을 싸와서는 다른 거 먹고 싶으면 다 사다 줄 수 있으니 뭐든지 말만 하란다.      

     

 저녁이 되면 오빠는 매일 퇴근하고 병실로 온다. 내가 걱정되어서기도 하고, 병원에서 밥을 제대로 못 먹었을 엄마를 모시고 날마다 병원 근처 맛 집 탐방을 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수술 후 일주일이 지날 무렵, 엄마와 오빠가 집에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이 병실에서 꾸벅꾸벅 졸던 엄마의 모습이, 오빠의 뒷모습이 그리워지는 날이 오겠지.’ 하는 생각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피하고 싶은 고통스런 순간에도 그리운 장면은 언제나 숨어있었다. 기다란 무채색의 시간 속에 반짝이는 순간들이 징검다리처럼 존재했다. 언제나 그 순간을 힘차게 디디며 어두운 강을 건너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했다. 피하고만 싶은 지금 이 시간에도 먼 훗날 그리워할 시간들이 분명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휘청거리는 마음을 지탱했다. 내가 얼굴도 모르는 옆의 환자를 보며 기도했던 간절함보다 더 큰 간절함으로 엄마도 오빠도 오랜 시간 기도하는 마음이었겠지. 휴가를 내고 열흘이상 부인 곁에서 애써 더 웃어 보이며 한시도 쉬지 않고 간호하는 옆 환자의 남편도 그러하겠지. 아픔이 당연하지 않듯 위로도 당연한 것이 아니기에, 그들도 나도 언젠가 날벼락 같은 불행 속 그리운 장면들을 떠올리는 날이 올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아직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살아있기에 살아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곁에 있는 뜨거운 체온과 펄떡이는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애써 살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이전 12화 부지깽이 비망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