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낙산우공 Sep 13. 2023

복교라는 망령

다시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다

학교에 돌아가는 일이 수월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또 많은 우여곡절이 아이와 가족 모두를 괴롭힐 수 있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슬프지만 말이다. 푸른나무재단의 위드위센터에서 운영하는 일시보호프로그램은 학교 문턱도 넘지 못하던 아이에게 숨통을 틔워 주었다. 그러나 일시보호는 말 그대로 일시적으로 보호해 주는 것이다. 아이의 복교 일정이 장기화되면서 조금씩 문제들이 불거졌다.


학교는 장기간 학교를 비운 아이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학교의 관리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아이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조직은 언제나 조직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의 건강상태보다는 학교의 관리책임이 신경 쓰인 학교는 위드위센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압박은 당연히 위드위센터의 재량권을 견제하는 장치로 작용했다. 센터 역시 아이의 회복보다 일시보호프로그램 운영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돌아보게 되었다.


학교도 센터도 잘못이 없다. 어떤 조직이건 조직에 위협이 되는 요소는 모두 경계하게 되어있다. 문제는 꽤 긴 시간 동안 아이가 정상적인 학교생활에 복귀할 만큼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상은 개인을 여유롭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세상은 제도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관용을 베풀지만 그 책임소재를 따지는 상황이 오면 꼬리를 감춘다. 이것이 제도권이라는 존재가 갖는 숙명이다. 내가 아내에게 늘상 하는 말이 있다.


"내 새끼는 내가 지킨다"


세상이 아무리 너그러워도 남의 새끼를 끝없이 배려해 주진 않는다. 아이에게 무한히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부모다. 그래서 부모가 버린 자식은 어디에서도 거두워주기 힘들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가 바로 이들이다. 자식을 버린 부모를 비난하기에 앞서 사회가 이들을 끌어안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판타지(?)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주인공이 자신 밑에 있는 전공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환자 포기하는 의사는 의사도 아니야!"


이 비현실적인 대사를 보며 들었던 생각은 이랬다. 과연 요즘의 의사 중 환자를 포기하고 말고의 대상으로 삼는 이가 얼마나 될까였다. 환자를 자식으로, 의사를 부모로 치환하면 분명히 말이 된다.


"자식 포기하는 부모는 부모도 아니야!"


인생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은 세상 사람 누구도 믿지 않는다. 제아무리 착한 사람도 자신에게 네 번 이상 잘해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네 번 이상 잘해주었다. 물론 이 드라마도 판타지다. 그런 아저씨는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네 번 이상 잘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부모뿐이다. 부모는 네 번이 아니라 평생 잘해 주어야 한다. 그게 부모라는 타이틀이 내린 운명이다. 난 자발적으로 그 타이틀을 차지했으니 그 운명도 받아들이고 산다.


아이가 복교를 결정하고 복교일이 다가올수록 잠을 못 자고 있다. 밤마다 학교 가는 꿈을 꾼단다. 그 꿈이 평화롭다면 잠을 못 이룰 리 없다. 트라우마 상담치료에서도 두 주째 학교라는 주제를 거부하고 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지만 학교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힘겨운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다시 휴학을 권유했지만 아이는 단호히 거부했다. 휴학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이에겐.


복교를 하더라도 한동안 아니면 끝까지 조퇴와 결석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곁에는 네 번 이상, 아니 계속 내가 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