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마 전 나현 님이 건네어 주신 묵직한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느라 골치가 아팠는데, 이번엔 정해진 질문조차 없다는 것이 더 머리가 아픈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혹시 제가 수업 난이도를 잘 조절하지 못해서 나현 님을 힘들게 한 걸까요? 그렇다면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나현 님의 질문처럼 당장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라든가, 당장 나를 뚫고 뛰쳐나오려는 이야기 같은 것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너무 막연하게 느껴지고 가닥이 잘 잡히지 않아서 첫 문장을 적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굴튀김’ 이야기처럼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서부터 이야기를 확장해 나가 볼까? 그러다 보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지 않을까? 같은 궁리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어제 있던 일부터 차근차근 꺼내볼까 해요.
어젯밤부터 오늘새벽까지 정형외과 진료를 볼 수 있는 응급실을 찾아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몸이 아플 일이 없는 사람들은 의료파업이 잘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요 몇 달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제가 아파서 응급실을 찾은 것은 아니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먼저 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저는 어릴 때부터 몸이 작고, 마르고, 약해서 강해지고 싶은 열망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체육대회를 하면 줄다리기 같은 종목에서 반드시라고 할 만큼 열외 되고는 했는데 그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마음속에 묘한 반항심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한몫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인데 겉보기에 조금 허약체질 같다고 해서 이 승부에서 제외되는 게 맞는 것일까? 같은 생각들이 차올랐지요.
체력장에서 오래 달리기를 할 때는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그 누구보다 무서웠던 학생주임 선생님이 그만 뛰어도 된다고 어르고 달래며 쫓아오시기까지 했는데 꼴등을 할지라도 포기는 하기 싫어서 목에서 올라오는 쇠 냄새를 삼키며 끝까지 완주하고는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스무 살이 되면서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격렬한 운동을 통해서 억눌려 있던 반항심을 표출하고 싶었는지 격투기 체육관을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이십 대 때는 회사생활을 했는데 자꾸 눈을 돌려 생활 체육 복싱 대회들을 기웃거리고 출전하기도 하면서 경쟁이라는 것을 생활처럼 받아들이고 지냈어요.
경기장의 링 위는 생각하는 것보다 높아서 특히 고소공포증이 있는 저는 살짝 울렁거림이 느껴질 정도였고 외부와 링 줄로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약간은 외롭게 느껴지기도 하는 공간이에요.
그런데 그 사각의 링 위에 유일하게 같이 서있어 주는 단 한 사람을 쓰러트리거나 본인이 장렬하게 쓰러져야만 링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게 격투기의 잔인한 룰이랍니다. (쓰다 보니 나현 님과 현아 님이 하고 계신 일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은 사각의 요가 매트 위에 오직 홀로 서 있어야 하는 요가를 하는, 어쩌면 조금 비슷하지만 다른 일에 빠져있지만, 그 매트 안에서도 아사나를 대충 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자기 자신과 고요하지만 격렬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것이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튼 이 격투기 마니아 시절 맺은 인연들로 인해 요가강사라는 직업과 체육관 일을 현재까지도 병행하고 있는데요. 그 업무 중에 하나로 선수들의 경기를 서포트하고 부상을 당하는 일이 생기면 같이 응급실을 찾게 됩니다.
어제는 제가 가족처럼 아끼는 동생이 경기 중에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 급성 스포츠 손상을 입어서 진료 가능한 응급실을 한참 찾아다녔어요.
승리자는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그날의 주인공이 되고, 패배자는 아픈 몸을 치료해 줄 병원을 찾아 전전해야 하는 이 명확하고도 냉정한 승부의 세계를 보고 있노라면 요가 매트 위가 얼마나 포근하고 안전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요가 덕분에 이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일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완벽히 안전하다고 느끼는 매트 위의 공간이 핵전쟁 시대의 쉘터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까요, 이 공간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도 가족 같은 선수들이 치고받고 쓰러지는 전쟁 같은 모습을 자주 목격하기 때문에 어떤 트라우마를 지속적으로 안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요즘 그런 증상들이 심해지고 있었어요. 판정패로 승부가 난다면 그나마 괜찮은데 앞서 몇 번의 경기에서 선수들이 계속 K.O. 패를 당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을 연속적으로 보게 되었거든요. 두 달 전에는 그 모습에 동화되어 저도 같이 다리가 풀려 주저앉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정말 더는 못하겠다, 한 번씩 경기를 치를 때마다 몇 년씩 늙는 것 같다."라고 푸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선수들과의 인연이 오래되다 보니 그 속에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인격적으로도 성숙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사실 하나는 선수들이 가정을 이루고 나이를 먹을수록 시합 상대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내가 쓰러트려야 하는 상대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나쁘게 말하면 연약해진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힘이 빠졌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연약함을 다시 한번 뛰어넘을 수 있다면 진정한 선수로 거듭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변호사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직업적으로 반드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격렬한 전투를 매번 치러야 할 텐데 상대측 변호사에게 동질감을 느끼실 때가 있는지, 그리고 그 마음이 자신을 약하게 만들기도 하는지 아니면 더 강하게 만들기도 하는지 궁금해집니다.
글을 써내려 가다 보니 어쩌면 두 분이 가끔 '요가라는 안전지대'로 피난을 오시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안전지대에 계속 머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요가 강사가 된 저나 다능 선생님의 마음도 조금은 비슷한 면이 있을까 짐작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