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사무실로 들어와 지나간 업무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책상을 잠시 정리하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습니다.
저는 보통 일요일 저녁에 답장을 쓰곤 하는데, 같은 공간이지만 변호사라는 갑옷을 벗은 채 자판을 두드리는 이 시간이 스스로를 토닥이는 시간인 것 같아요.
다능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지만, 선생님은 이미 길을 잘 찾아서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아 제가 할 일은 한 가지, 같은 편이 되어 선생님이 가는 길에 제 눈길을 고요히 얹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같은 편 먹기는 제 특기 중 하나이니, 앞으로 제가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봐 주세요.
학창 시절, 저는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이었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말 주머니가 비어버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부모님께는 별말 없는 딸이 되어 방에 콕 들어가곤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실에 놓인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간을 좋아했고, 빈 화면이 그 누구보다 제 말을 잘 들어주는 존재 같았어요. 그리고 오늘 마주한 빈 화면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 들게 하네요.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제가 글쓰기를 좋아하나 평탄한 인생을 살았으니 대작가가 되기는 힘들고(저는 맞는 말이어서 군말 없이 수긍했어요), 법대에 가서 "힘을 가진 글을 쓰라."는 말과 함께 법대를 추천해 주셨어요. 일단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었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 상태에서 법대에 지원했는데, 다른 과는 다 떨어지고 법대만 붙었지 뭐예요.
그리고 법대생의 운명으로 사법시험을 보게 되었고, 합격 후에는 직역 선택을 해야 했어요. 물론 성적에 따라 고르기도 해야 했지만, 저는 일말의 의심 없이 변호사를 선택했어요. 마주한 사람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수사를 하거나, 나의 최종 판단으로 타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역할은 잘할 자신이 없었어요. 다만 벼랑 끝에 있는 것 같은 사람과 같은 편이 돼서 함께 걸어가는 일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변호사가 되었어요.
그럼에도 쏟아지는 전화와 상담에 말 멀미가 나거나, 마음이 부대끼는 일들이 일어나면 제 능력과 업무 적합성에 대해 의심하다가 직업을 바꾸는 일은 더 어렵다는 생각 끝에 다시 이 일을 사랑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 일을 습관적으로 반복하곤 합니다.
그렇게 복잡해진 머리를 싸매고 요가원에 가고(상큼한 얼굴로 요가원에 가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어요), 선생님의 목소리에 맞춰 아사나를 하다 보면 비로소 엉킨 실타래 같은 머릿속이 잠잠해지기 시작합니다.
엉킨 실타래가 기적적으로 풀어지지는 않지만, 잠시 옆으로 밀어 두고 몸과 마음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지고 나면 다시 엉킨 실타래를 마주 볼 힘이 생겨요. 사건에 빠져 뜨거워진 몸과 마음을 잠시 빼내 식혀주는 시간을 가지는 것 같아요.
이런 요가의 효능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요가원에 빠지는 것이 업무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일과 동의어가 되어 가급적 요가원에 자주 가는 것이 업무를 잘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되었어요.
그리고 업무시간 중에 짧은 명상을 하기도 하는데, 하나의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넘어갈 때 징검다리로서 명상을 해요. 제게 긴 시간 명상은 졸음이 쏟아지거나 산발적인 생각들로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5~10분 남짓의 명상은 요긴하게 하고 있어요.
하나의 사건에 대해 여러 증거를 첨부하면서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법적 주장을 정리하는 서면을 쓰다 보면 서면이 완성된 후에도 그 사건의 여파가 남아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 바로 집중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럴 때 아로마 오일을 손바닥과 목뒤에 바른 후 코 주변에 손바닥을 모으고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감고 5~10분 정도 시간을 보내요.
손이 마치 인공호흡기가 된 것처럼 입과 코 주변을 감싸고 호흡하면서 아로마 오일을 흠뻑 흡입하고 눈을 감고 있으면, 완성된 서면의 사건 내용이 잘게 분쇄되어 휘날리면서 아주 어둡지만은 않은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 기분이에요. 그리고 눈을 뜨면, 다른 사건을 시작할 수 있는 여백이 생겨 새로운 증거와 사실관계를 다시 쌓아갈 수 있게 돼요.
이렇게 쓰고 보니 제게 요가와 명상은 일로 인해 복잡하고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비워내기 위한 수단이네요. 그래서 만일 제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요가든 명상이든 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현아 언니가 퇴사하고 나서 요가를 쉬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저는 퇴사할 일이 없는 개업 변호사여서 요가를 쉬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가원에 가는 횟수와 일의 강도가 비례하는 생활을 하고 있지요.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도 9월이 되면서 그 기세가 점차 사그라들고 있어요. 나뭇잎들은 벌써 노란색과 갈색 물감을 살짝 머금은 색으로 바뀌어 있더라고요. 그리고 곧 추석이 와요. 추석 즈음에는 재판 일정을 잘 잡지 않아 업무강도가 좀 낮아져 한숨 돌릴 수 있어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다능 선생님 편지는 아마 추석 이후에 받아 볼 테니, 그전에 미리 추석 인사를 드려요. 이번 추석, 제가 다능 선생님과 같은 편이 되었어요. 속상한 일이 있거나 마음이 울렁거릴 때, 요가와 명상도 좋지만 같은 편에게도 잠시라도 귀띔을 해주세요. 그러면 저의 특기를 발휘해 볼게요.
아, 그리고 지선 선생님께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요.
이번에는 특별한 질문 없이 선생님이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안 될까요.
예전의 저는 토해내고 싶은 말을 글로 쓰곤 했었고,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가곤 하네요. 선생님의 토해내고 싶은 말, 듣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