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으로 무더웠던 추석 연휴가 지나서야 비로소 세력다툼 끝에 퇴각하는 여름의 끝자락이 보이네요.
평소 카페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는 기분을 궁금해하다 오늘은 드디어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편지를 쓰고 있어요. 아주 똑같지는 않겠지만, 노트북을 펼치면서 비슷하게나마 그 기분을 느껴보고 있어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사무실보다는 집중력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공간이 변하니 기분 전환이 되는 느낌이네요.
오늘은 두 선생님이 제게 전해 주신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편지를 써보려고 합니다. 질문은 두 개이나, 제게는 결국 동전의 양면과 같은 질문이어서 하나의 답변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게 소송과 요가는 빛과 그림자와 같은 관계라고나 할까요. 낮에는 소송을, 밤에는 요가를 하고 있고, 소송을 잘 준비하는 마음으로 요가 수련에 임하고 있어요.
지선 선생님은 소송의 상대방 변호사에게 동질감을 느낄 때가 있는지, 그 동질감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다능 선생님은 의미 있는 아사나가 무엇인지 물으셨어요. 두 질문을 받고서 저는 오랫동안 좋아했던 책이 다시 떠올랐어요.
‘시절인연’이라는 말처럼, ‘시절독서’가 있어서 그 시절마다 저를 이끌어주는 책 속의 목소리를 만날 때가 있어요. 소송이 낯설고, 소송에 익숙하지 않던 저연차의 변호사였을 때 저는 상대적으로 작은 전투 같은 소송에도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널뛰기하는데, 국가의 존망을 어깨에 짊어지고 전투를 한 이순신의 마음이 궁금해 소설 ‘칼의 노래’(김훈 지음)를 읽게 되었어요.
그리고 ‘칼의 노래’에서는 아래에서처럼 '끼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조금 길긴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문단이어서 그대로 인용해 볼게요.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 새 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 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소설에는 이순신이 적을 만나 싸우는 모습도 나오지만, 적을 만나기 전과 후의 모습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칼의 노래’에서는 전투 장면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매번 닥쳐오는 끼니 앞에서 고뇌하는 모습, 전투 후 포로들이 우는 모습에 참담해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요. 한 번의 전투를 위해 셀 수 없는 끼니를 거쳐야 했고, 그 전투 이후에는 개별적인 사람으로서 울음이 서식하는 포로들과 마주해야 이순신의 모습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러한 이순신의 모습을 보면서 저의 소송(전투)은 ‘긴 호흡의 끼니와 울음이 뒤섞인 채 의뢰인과 함께 견디는 시간과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소송을 위한 상담을 할 때 “소송은 최소한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니 그 시간 동안 잘 견디셔야 합니다.”는 말을 꼭 하는데, 그 말은 저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요.
보통 민사재판은 2~5번 정도 열리게 되고, 첫 재판의 변론기일이 소장이 접수된 날로부터 약 5개월 후나 그보다 더 늦게 잡히는 경우가 많은데요. 첫 변론기일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잡히다 보니, 의뢰인들은 그전에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함에 고통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변론기일이 잡히더라도 재판을 앞두고 상대방 측에서 제출한 반박서면에 담긴 상대방의 입장 위주로 각색된 주장과 공격적인 어투에 괴로워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소송의 주요 내용이 판사님을 설득하기 위해 재판기간 동안 법적 주장과 그에 맞는 증거를 제출하고 상대방의 주장에 반박하는 것이지만, 소송 중 대다수의 시간은 언제 끝날지 모를 터널 속을 기어가는 것 같은 막연함과 답답함을 버티고, 상대방의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주장에 울화통이 터지더라도 견디면서 보내게 돼요.
그리고 이것은 밀물처럼 다가오는 끼니와 울음을 품은 포로와의 싸움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소송을 하더라도 소송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고, 생활은 계속되어야 하므로 과거의 사건에 매몰되지 않고 매일의 끼니를 챙기면서 잘 버티고, 비록 적이라 할지라도 그 주장의 이유에 대해 외면하지 않아야 비교적 소송이 원만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상대방을 만나서 하는 전투보다는 우리 진영을 잘 정비하고, 유지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어요. 낮에는 의뢰인과 상담과 전화 통화를 하고 소장 및 준비서면 등 서면을 작성하면서 우리의 주장과 입증을 위해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증거를 수집하는데 대다수 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면 요가원에 가 수련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요.
결국 상대방의 공격보다는, 우리의 주장과 입증이 충실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상대방 변호사님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주장과 입증을 하는지 보게 되고, 그 모습은 제게 더 노력하게 하는 자극제가 돼요.
또한 민사 소송에서는 판결에 의한 승패보다는 조정과 화해권고결정과 같은 별도의 합의 절차가 마련되어 있어 링에서의 승부처럼 냉혹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상대방과 최대한 유연한 입장에서 마주하려고 해요.
소송에서 상대방은 대립 당사자이긴 하지만, 대리인으로서의 저는 당사자와 같은 강렬한 감정을 품지 않고, 긴 시간 동안 의뢰인과 함께 자멸하지 않고 잘 버티면서 소송을 끝내는 것이 중요한 목표예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난한 시간 동안 몸이 축나지 않기 위해 끼니를 챙기는 것처럼 요가 수련을 해요.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아사나는 그 끼니를 구성하는 밥과 반찬 같은 느낌이랄까요. 밥과 반찬이 한 끼의 영양소를 공급하기 위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한 시간의 요가 수련도 온몸을 스트레칭하고 근육을 키우기 위해 아사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그날 특별히 맛있거나 당기는(!) 반찬이 있는 것처럼 유독 그날따라 잘되는 아사나나 시원하게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아사나가 있긴 한데, 그때그때 달라서 현재 저한테 특별히 의미가 깊은 아사나가 있지는 않아요. 아! 최근에 우르드바다누라 아사나가 많이 좋아졌다고 칭찬받아서 약 10초간 기뻤던 기억이 있어서 현재 저한테 우르드바다누라 아사나가 좀 의미가 있어요. 칭찬받은 첫 아사나!
그렇다면 지선 선생님도 특별히 애정하는 아사나가 있을까요, 아니면 아사나와 관련된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