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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로 들어서는 문

지선

by 오늘도 나마스떼

일요일 저녁은 늘 카페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면서 마무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번 편지만 하더라도 파삭파삭한 얼음을 깨물며 열심히 자판을 두드려댔는데 오늘은 뜨거운 커피를 연료 삼아 몸을 데우며 자꾸만 서늘해지는 손끝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어요.


이 늦은 시간에도 사람이 꽤 많아서 선택지 없이 출입문 앞자리에 앉게 되었어요. 분주하게 여닫히는 출입문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너무 뺏기지 않으려 노력 중인데요, 음 확실히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니 완연한 가을이군요. 트렌치코트, 가죽 재킷, 두툼하고 밀도 있는 짜임의 니트들...




인도 전통의학인 아유르베다에서 마음의 특징을 규정하기를 ‘마음은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라고 합니다. 그 뜻은 마음은 동시에 두 가지의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쓰는 것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탁구공처럼 두 가지의 자극사이를 빠르게 오고 가는 것 일뿐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의 자극 속에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바쁘고 고단한 일이 되어버릴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인도 전통의학에 근거해서 문 앞에 앉아 많은 자극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오늘은 편지가 조금 늦어질지도 모르니 이해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역시 엄살로 시작하지 않으면 글이 써지지 않습니다.)


험블 워리어에서 진짜로 험블을 경험하게 된다는 현아 님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처음으로 그 아사나에 작은 호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허벅지가 불타는 것 같아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만 해왔거든요.


이번 주 수련에서 왕비둘기 자세를 할 때는 다능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골반을 더 잘 정렬해 보려는 노력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유연한 다능 선생님의 척추를 떠올리니 저의 척추도 갈대처럼 한결 가볍고 부드럽게 휘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그리고 한주의 수업동안 회원님들께 나현 님처럼 골고루 편식하지 않는 요가 습관을 길러드리기 위해 머리를 싸매면서 아사나 시퀀스를 연구하기도 했지요.


아사나에 담겨있는 저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면 아마 두 변호사님의 사건번호처럼 끝없이 늘어놓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거의 모든 아사나가 적어도 하나씩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정하는 아사나라고 하면 뭔가 하나가 탁! 떠오르지 않지만 반대로 힘들었던 아사나라고 하면 즉각적으로 하나의 아사나를 떠올릴 수 있답니다.




출산을 해보신 분들이 듣는다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게 느껴질 수도 있는 질문이겠지만 제가 예전에 자연분만을 하고 오신 요가 선생님께 우스트라 아사나(낙타자세)를 버티는 것보다 출산의 고통이 더 큰가요?라는 엉뚱한 질문을 했던 적이 있어서 그 생각을 하니 얼굴이 붉어집니다.


변명하자면 그만큼 저는 다능 선생님과는 정반대로 선천적으로 후굴이 잘 되지 않는 나무토막 같은 몸이기 때문에 후굴수련이 머리끝이 쭈뼛 서도록 끔찍하게 고통스러웠습니다.


당시엔 요가의 길을 가려면 우스트라 아사나를 꼭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어금니를 깨물며 버텼는데 이 낙타의 작은 혹을 넘는 것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하는 길보다 더 지난하게 느껴졌었답니다.


사람은 눈도 앞에 달렸고, 입도 앞에 달렸고, 밥도 앞에서 먹고, 인사도 앞으로 하는데 왜 몸을 뒤로 꺾어야만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웃기는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했으니까요.


지금이야 많은 시간이 흐르고 그 안에서 조금 더 유연한 몸을 가지게 되었지만 아직도 수업시간에 회원님들께 우스트라 아사나를 요청할 때마다 마음 한 곳이 묵직해진답니다.


그래서 유독 후굴을 힘들어하는 분들을 보면 해마다 자식의 생일이 돌아오면 알 수 없는 산후통 같은 것들이 반복된다는 어머니들과 비슷한 증상 같은 것을 겪게 되는 것 같습니다.

보고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등과 허리가 뻐근하고, 괜히 짚고 있는 발가락이 아프기도 하고 팔꿈치나 팔이 저려오기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스트라 아사나는 더 세세하고 정성스럽게 안내를 하게 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사찰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가 없네요.


사찰 안으로 들어가려면 보통 세 개의 문을 지나야 하는데 첫 번째 문은 일주문이라고 해서 가장 바깥에서 경계를 나누는 문입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아. 이제 내가 사찰의 영역으로 들어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요.


두 번째 문은 사천왕문으로 사찰을 수호하는 네 명의 대왕이 서있는데요. 그 생김새가 너무 무시무시해서 간혹 그 형상에 겁을 먹고 우는 아이들이 있기도 하답니다. 우스트라 아사나는 저에게 사천왕문과도 같은 아사나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일주문처럼 저를 요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아사나도 있는데요. 그건 타다 아사나(바르게 선자세)입니다.


생전 처음 요가수업을 들은 날, 선생님이 타다 아사나에서 눈을 감아보라고 말씀하셨지요. 눈을 감자 중력에 맞서 바로 서려는 몸의 감각들이 느껴졌습니다. 그냥 서있는 줄만 알았는데 이리저리 무게 중심을 옮겨가며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마저 계속되는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헌신과 노력들이 경이롭게 느껴지면서 몸에 대한 애정이 생겨났습니다.


그날 눈을 감기 전까지 저는 정신의 작용을 몸의 작용보다 더 높이 샀던 것 같습니다. 몸은 그저 정신의 도구라고만 생각해서 은연중 육체를 정신의 한참 아래에 놓고 어쩌면 조금은 무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날 눈을 감음으로서 요가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뜨게 된 것이죠.


요즘도 가끔 수련이 진저리가 나게 힘들 때면 '내가 왜 굳이 요가를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그냥 눈을 감고 가만히 서있습니다. 그럼 어느덧 바래지고 해졌던 마음은 처음 요가를 시작했던 때로 돌아가 있곤 합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죠.


'공부를 요가 수련을 하듯이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는데요.


이제는 말하실 때가 됐습니다.


현아 님,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운 질문일 수도 있지만 공부의 비결 같은 게 있다면 얼른 내놓아주세요.


특히 지치는 순간엔 어떤 식으로 그 고비를 넘기셨는지도 궁금해요.


그 어느 때 보다도 간절하게 빠른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사진 : 이지선 作, Ustras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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