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선님이 저에게 물음을 던져주시면서 '공부를 요가수련 하듯이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실 때가 있다고 하셨는데, 반대로 저는 한 시간 요가 수업을 듣는 것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아 '요가수련을 공부하듯이/일하는 만큼 하루 종일 해봤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때가 가끔 있어서, 뭔지 모를 웃음이 났습니다.
또 지선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여러모로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많다는 걸 느끼는데요.
특히 절에 몇 번 가보지 않았던 제게는 사찰안에 들어가기 위한 ‘세 개의 문’ 이야기가 참 흥미로웠고, 불현듯 예전에 어느 절에 갔을 때 어떤 문을 지나면서 무서운 형상을 보고는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세 개의 문 중에 두 개의 문만 알려주신 지선 님의 뜻은, 제게 세 개의 문에 대해서 더 공부해 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열심히 ‘세 개의 문’에 대해서 찾아보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지선 님이 세 개의 문 이야기를 통해 '요가의 길'로 들어선 이야기, 지선 님에게는 사천왕문과도 같이 느껴지는 아사나 이야기를 해주셨으니, 저도 물음을 주신 ‘공부’에 관해서 비슷하게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사실 저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들이 차고 넘치는데, 제가 ‘공부의 비결’을 말한다는 게 적절할까 싶기도 하여 쑥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저는 항상 순탄했던 것보다 ‘고비’들이 더 많았던 것 같아서, ‘지치는 순간엔 어떤 식으로 그 고비를 넘겼는지’에 관해서는 제 경험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일주문에 들어서다]
저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난데없이 갑자기 우주과학에 꽂혀 물리학과 우주과학 등을 다룬 과학잡지 읽는 것에 행복해하던 소녀였고, 그래서 당연히 이과를 선택해서(지금은 이과, 문과 구분이 없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수학, 물리학 등 과학을 열렬하게 공부했었어요. 특히 수학과 물리학이 재미있었습니다.
2년간의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덕질이 계속되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을 앞두고 갑자기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갑자기 수준이 월등히 높아지고 깊어진 수학과 물리의 계산식 앞에 그 전과 같은 흥미와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에 더불어, 앞으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수학과 과학 실력이 더 일취월장하게 늘어야 하는데 스스로의 실력은 그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아 덜컥 겁을 먹게 되었고, 결국 '수포자'가 되었지요.
그때 처음 진로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게 되었고, 어쨌거나 대학을 나와서 ‘뭘 해 먹고살지’, ‘직업’에 관해서 고민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 현실적인 고민들 앞에서 밤에 이불을 싸들고 ‘별을 보러’ 다니는 것은 감상적인 취미로 남게 되었습니다.
많이 고민하다가 부모님과 상의해 보고, 믿고 따르던 선생님께 조언도 얻어보면서, ‘법대’를 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선생님께서 ‘변리사’라는 직업도 있으니, ‘법대에 가서도 수학과 과학을 접목시켜서 일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하지만 법대에 가서 적응을 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시 법대에는 애초에 입학할 때부터 ‘고시’라는 ‘특정 목표’를 가지고 들어온 아주 뛰어난 친구들이 많았고, 수학과 물리학, 우주과학에 대한 흥미와 지식에 비하면 사회과학적, 인문학적 지식이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했던 상태였어서 법대라는 곳에 금방 안착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당시 제가 얼마나 법대에 적응을 못했는지를 떠올려 보자면, 법대 1학년까지만 해도 아직 저에게 ‘현실’이란 “무한대로 팽창하고 있는 광활한 우주 속에 작은 한 은하계 안에서, 운이 좋게도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인 태양 주변을 돌면서 스스로도 빠르게 회전하고 있는 행성인 지구”였습니다(법조계에서 지내면서 이런 얘기 어디 가서 잘 못하고 살았었는데, 유튜버 ‘궤도’님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런데 '법대에서의 현실의 문제'란, “누가 누구에게 어떠한 형태의 범행을 저질렀는지”(형법), “누가 누구에게 언제까지 얼마의 돈과 이자를 어떻게 돌려받을지”(채권법) 등과 관련된 완전하게 다른 차원의 것이었죠.
그때 처음 성인이 된 이후 방황이라는 것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과로 전과를 할까, 당시에 법학보다 더 관심이 가던 심리학과 수업을 청강도 해보고 대학원 세미나도 들어보고, 학교 안보다 밖에 더 많이 머물면서 여러 가지 다른 곳들을 기웃기웃거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방황이라는 것도 대학생의 ‘학점관리’라는 현실 앞에서는 항복을 했습니다. 대학교 2학년 2학기 정도부터는 학점관리를 해야 고시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생각에 학점관리를 위해 법대 학과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학점을 잘 받기 위해’ 친구들 옆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보다 보니, 의외로 ‘법’이라는 게 재미있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법학’에 대한 저의 덕질이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덕질하듯 공부를 하다 보니 성적도 오르기 시작해서 자신감도 생기고, 고시공부하는 친구들 옆에서 같이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저도 친구들을 따라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법학’과 ‘사법고시’라는 일주문을 들어서게 되었고, 그 일주문을 들어서서 한 걸음씩 나아가자 ‘사천왕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천왕문 통과하기 1.]
‘사법고시’라는 일주문을 들어서서 한 걸음씩 나아가자 사천왕문이 나왔습니다. 사찰의 네 방위를 지키며 잡귀의 범접을 막고 사찰을 수호하는 사천왕문과 같이, 제가 ‘사법고시 합격’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사천왕을 마주하고 그 길을 안전하게 지나가야 했습니다.
제가 사천왕문을 안전하게 통과하게 되기까지 만났던 ‘고비’는 크게는 1) 교만함, 2) 나약함으로 구분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극복해야 할 첫 번째 고비는 ‘교만함’이었는데요.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친구들 옆에서 학점관리를 위해 학과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불운하게도’ 우연히 사법고시 1차를 아주 수월하게 ‘덜컥’ 붙어버렸고, 같은 해 치른 동차 2차 시험에서 합격선에는 미치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고시는 1차 시험뿐 아니라 훨씬 더 높은 산인 2차 시험이 기다리고 있는 지난한 마라톤과 같은 과정인데, 마음의 준비나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메타인지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덜컥 1차 시험을 합격했던 것은 거의 ‘재앙’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내가 실력이 좋아서 혹은 ‘당연히 붙을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1차 시험에 붙었던 것마냥, 1차 시험에 붙은 후 더 열렬히 최선을 다해서 달리기는커녕 나태해지고 여유로워지고, ‘내가 지금 어떤 레이스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각 없이 그냥저냥 2차 시험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당연히 저는 아주 잔인한 결과를 마주해야 했고, 매우 아까운 점수로 낙방하게 됩니다. 이때도 훨씬 더 철저하게 나쁜 점수로 떨어졌어야 했는데, 약간의 아까운 점수차로 낙방하게 된 것 또한 저에게는 ‘독(毒)’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두번째 2차 시험에서 떨어지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1차 시험부터 다시 보아야 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저는 다시 1차 시험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에 아주 잘못된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시험에 떨어졌던 것은, 붙을 정도의 실력도 아니고 모르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떨어졌던 것이었는데, 1차도 금방 붙었고, 2차도 아쉽게 떨어졌으니까 조금만 공부를 더 하기만 하면 1차도 다시 금세 붙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결국 그때 당시 극악무도한 난이도의 '8지선다' 시험 유형으로 새롭게 도입된 1차 시험을 떨어졌고, 저의 기분은 이전에 1차 시험을 붙었던 찰나 같은 기쁨은 뒤로 하고, 나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때 더더욱 ‘교만함’이 하늘을 찔렀던 것을 고백하자면, 부끄럽게도 ‘20대 중반에 사법시험에 최종합격하지 못하면 인생 끝난 거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그때 나만의 고유한 목적이나 목표, 동기가 없이 친구 따라 강남 가듯 공부했던 저에게, 단순 비교 집단은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었고, ‘내 친구들이 다들 그 나이에 붙어 나갔는데, 나만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이 저를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게끔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저는 방향을 잃고, 목표도 잃고, 목적의식도 없이 부유하면서 다시 방황하는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친구들이 함께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내가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이 없으니, 혼자 고군분투할 동기가 없게 된 것이죠.
그때 개인적으로 상당히 깊은 슬럼프에 빠지게 되어 괴로웠고,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일단 휴학했었던 학교를 복학하여 다녔습니다.
그때 남과 비교해서도 그렇지만, 저 스스로도 ‘목적이나 목표를 잃은 삶’이 매우 불행했기 때문에, 당시에 학교 도서관에 가서 그 안에 제발 정답이라도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 제목에 ‘행복’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들을 마구 골라 읽기 시작했고, ‘내가 지금 행복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읽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결국 제가 ‘겸손하지 못했다.’는 답을 찾게 됩니다. 과정에 전혀 겸허하지 못한 마음으로 사상누각을 짓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설익은 상태로 무언가를 얻으려 했다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나는 아는 것이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아주 기본부터,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다시 목표가 생기면서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제 뇌리에 박힌 신념은 ‘무엇을 하든 절대 사상누각을 짓지 말자.’는 것과 ‘샴페인은 일찍 터뜨리면 안 된다.’는 것이고, 매 순간 ‘무엇을 하든 항상 기본부터 아주 탄탄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완전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만난 고비들과 그걸 극복해 나간 과정을 적어보려고 하니 글이 끝도 없이 길어지는데, 한 편으로는 그때 당시에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기억들이 올라오면서 마음이 많이 쓰려옵니다. 오래 전 일인데도 기억을 더듬어서 글로 써내려가니 그 때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아쉽지만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두 번째 고비였던 “나약함”에 대해서는 다음 편지에서 이야기를 풀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은데, 편지를 여기서 끊어서 미안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다능 님!
이번 주 수련 전 명상시간 중에 해주신 “숨으로 깊게 닻을 내려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보라”는 말이 인상 깊었고, 저의 “‘차파아사나’가 엄청 좋아졌다.”는 다능 님의 칭찬이 기분이 좋아서 계속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다능 님은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어떤 칭찬을 가장 듣고 싶고, 듣게 된다면 가장 기쁘거나 행복할 것 같은 칭찬이 무엇일지’ 궁금해지네요.
다음 편지 기다리겠습니다.
[사진 : 이지선 作, 어떤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