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일요일 저녁을 마무리하며 말문을 열게 되었는데 오늘은 월요일을 시작하며 글을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 한낮의 분위기는 또 어떤 이야기로 저를 이끌어갈지 궁금하네요.
지난 주말에는 야외요가 수업을 들으면서 잔디밭을 한참 굴러다녔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10월 말의 가을볕이 그렇게 뜨거울 수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오징어라면 정말 잘 구워졌을 거예요.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살 냄새를 맡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잔디밭 깊숙이 고요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벌레 친구들이 매트 위로 올라와서 제 손등을 타고 팔뚝까지 기어오르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벌레를 유독 무서워하는 저는 진저리를 치면서 팔을 털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야외요가 스냅사진을 남겨주시는 사진작가님이 주위를 맴돌고 계셨기 때문에 자칫 이상한 표정이나 몸짓이 누군가의 하드디스크 속에 평생 남게 될까 봐 매 순간 온화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입 꼬리를 끌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이날의 한 시간 수업은 제가 경험해 본 요가 수업 중에 가장 길고 힘든 클래스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예전 산속의 사찰에서 처음 지내게 됐을 때 주지스님께서 적응하는데 불편한 것은 없는지 물어보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른들 말에는 무조건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저는 그날도 버릇처럼 “네. 스님!”이라고 씩씩하게 대답했었는데요,
같이 근무하는 보살님이 그런 저를 보시고는 제가 벌레를 볼 때마다 발작하듯이 놀란다며 어쩌면 좋을지 대신 고민을 여쭤보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지스님이 답해주시기를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만 보지 말고 벌레도 보고, 나만 사랑하지 말고 벌레도 사랑해 주라고 말씀하셨지요.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너무 사랑하게 되면 두려운 것이 많아지고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일까?’ 그날의 짧은 대화는 제 마음속 깊이 화두로 남아 있었습니다.
서촌 골목의 곳곳을 누비며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작은 사물들을 관찰하고 있을 다능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려 봤습니다.
사실 저는 서촌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인터넷 검색창의 도움을 받아보았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부터 한 시간 반의 거리에 위치한(인천에서는 어디를 가더라도 한 시간 반이 걸린다는 법칙이 여기서도 통하는군요) 그곳의 서점이나 카페, 소품샵과 한옥 숙소들에 이어서 그 동네에 거주하는 고양이들 사진까지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서촌 곳곳에 담긴 누군가의 아름다운 마음이나 이야기, 손길을 느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을 선생님의 얼굴과, 그리고 매 수업시간 회원님들의 몸짓을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표정들까지 선하게 그려집니다.
동시에 별을 사랑하는 천문학 소녀로 눈을 반짝이고 있을 현아 님의 모습도 그려보았는데요, 윤동주 시인처럼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셨을까요?
‘무한대로 팽창하고 있는 광활한 우주 속에 작은 한 은하계 안에서 운이 좋게도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인 태양 주변을 돌면서 스스로도 빠르게 회전하고 있는 행성인 지구’.
그 안에 티끌보다 작은 자신의 존재를 이미 인식하고 있으며 현실적인 문제들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하나씩 답을 찾아가고 있는 그 시절의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기본적인 동양사상이나 요가의 사상 자체가 대우주의 반영인 인간을 소우주라고 인식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보면 현아 님은 이미 그 과거부터 요가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소우주인 ‘자신의 몸’에 대해 열심히 탐구하는데 빠지신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다능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자면, 저는 어릴 때부터 몽상가의 기질을 타고나 어른이 되는 길을 아직도 한창 걷고 있는 중인데요, 요즘은 ‘조금 더 현실적인 내가 되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 막연한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딱 두 가지 정도의 원칙을 정해놓고 살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1. 두려움은 모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므로 잘 알려고 노력하기
2.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하기
매 순간 내가 이 두 가지 원칙의 전제하에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그 원칙 속에서 늘 깨어있고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요,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똑바로 보고 알아가기 위해 집중하고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해답을 더는 상상 속에 맡기지 않고 혼자만의 지레짐작으로 넘겨짚지도 않고 조금 더 똑바로 보고, 듣고, 다가가는 연습을 하는 것이 난생처음 걸음마를 시작한 돌쟁이 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은 키가 훌쩍 웃자라 버려서 걸음마에 실패해 넘어졌을 때 전보다 훨씬 큰 아픔이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스스로 내디뎠던 한걸음 한걸음의 기억을 상실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음에 감사하면서 계속 나아가보려 합니다.
위의 두 가지 원칙은 요가를 하는데도 그대로 적용해보고 있는데요.
인체 해부학 공부를 통해 인간의 신체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아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요가 수련을 할 때도 스스로 멈출 때와 나아갈 때의 구분이 수월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수업시간에 회원님들의 자세를 보면서도 머무르거나 바꿔나가야 할 부분을 아주 잘 구분해 드릴 수 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작가의 여정’이라는 전시회에서 몇 달 만에 세분 모두를 만나 뵙게 되었는데요, 특히 현아 님과 다능 선생님은 제 인생에서 두 번째로 뵙는 것이었지요, 그날 혼자 생각하기를 굉장히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느껴져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끔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일상 속에서 자주 함께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을까요?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두 분도 비슷한 기분이 든다고 이야기를 꺼내셨지요. 서로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면서 개인의 내면에 깊숙이 잠겨 있는 어떤 이야기들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어쩐지 굉장히 애틋하게 느껴졌습니다.
역시 낮에 쓰기 시작한 이 편지가 중간에 밥도 먹고 요가도 하고 생계를 위해 노동도 하고 다시 새벽에 마무리되면서 감성적으로 끝을 맺게 되나 봅니다.
이제야 어른이 되는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는 제가 오늘은 나현 님에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어느 순간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혹은 그 길목으로 들어섰구나! 하고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기억에 남는 한 걸음이 있다면 그 걸음을 내디뎠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