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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되다

나현

by 오늘도 나마스떼 Dec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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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한 가을 자태에 홀려 지난 주말에는 ‘어른의 여정’에 대한 답장 쓰기를 등한시한 채 하루는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고, 하루는 승학산 둘레길을 걸었어요. 요가 수련의 효과 덕분인지 장시간의 술자리였지만 별다른 숙취는 없었고, 다음날 둘레길도 호쾌하게 다녀왔어요. 그러다 오늘 요가원에서 지선 선생님을 보니 편지 생각이 번쩍 들어 부랴부랴 답장을 쓰고 있답니다.      


  요가원에 가면 지선 선생님이 해사한 얼굴로 “회원님~”하고 불러주시는데, 저는 종종 그 음성이 듣고 싶어 요가원에 갈 때도 있어요. 격하게 회원이 되고 싶어서랄까요. 선생님의 호명하는 목소리로부터 저는 맨몸의 회원이 되어 안전지대로 들어가 온몸을 엄폐한 후 들뜬 숨을 고르고, 흐트러진 몸가짐을 바로 하는 시간을 가지고 나면, 비로소 다시 세상에 나갈 힘을 얻고는 해요.      


  점차 나이가 들면서 외부에서 저를 처음 만나는 분들이 더 이상 저를 ‘학생’이나 ‘아가씨’로 부르지 않고 ‘여사님(응?)’, ‘사모님(정말?)’으로 부르실 때도 있어서 순간 흠칫 놀랄 때가 있는데요. 나름 격식을 갖춰 불러주시는 것은 다행일지도 모르나, 이제 더 이상 젊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잠시 침통해지기도 합니다.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변호사’라고 호명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변호사에게 기대하는 모습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해요. 그리고 제게 갖추기를 기대하는 모습에는 ‘어른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하루빨리 어른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것이 일을 잘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되었어요.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어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오는데요. 저는 어른과 어른이 아닌 자의 차이는 ‘책임’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어요. 저의 행동과 말에 책임을 다해야 하는 순간이 점차 많아지고 있고, 결국 맡은 바 책임을 지면서 제게 주어진 어른의 여정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리니 봐달라, 학생이니 봐달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어요. 오롯이 저의 책임으로 점철된 생활 속에서 미숙하거나, 경솔하거나, 알지 못하는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어요.


  한편으론 매번 어른이 되기가 버거워 그 무게감을 잊고자 술을 마실 때도 있는데요. 저의 알코올 라이프를 떠올려 보자면 대학생 때는 산악부 활동으로 주로 산에서 코펠에 약수처럼 술을 받아 마셨고, 연수생 시절에는 회식 자리에서 끝까지 남아 있는 저력을 보였으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취기와 졸음이 올라오는 바람에 더 이상 주당임을 자부하지 못하고 고꾸라진 술꾼이 되었지요.   

       

  그러다 최근 종종 술자리가 생겨 참석해 본 결과 요가 수련으로 체력이 좋아진 것인지 취기와 숙취가 아주 심하게 올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술자리에서도 요가에 대해 한참을 떠드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무려 술과 요가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둘의 공통된 추구 목적 중 하나는 ‘이완’ 아니겠어요? 다만 술은 이성의 마비를 통해 이완을 달성한다면, 요가는 아사나와 명상을 통해 이완을 달성한다는 점이 다른 점이었어요.      


  술은, 진탕 마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잠시 망각하면서 이완에 이른다면, 요가는 맨몸을 매트에 맡기면서 어른의 외피를 벗어두고 수련하면서 그 무게감을 잠시 덜어내면서 이완에 이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완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둘을 결합한 맥주요가가 탄생한 걸까요? 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궁금하긴 합니다.     


  그리고 술은 이성을 통제하면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이끌어내는 수단이 되기도 해서 술의 힘을 빌어 평소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청하기도 하는데요. 취중진담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술자리에서의 대화는 그 자체의 흥취로 본연의 역할을 다하고, 그것을 일상생활로 확장시키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둘이서 만나 대작을 하면서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선호하다가,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는 일이 잦아지고 연속성을 갖기 힘든 대화에 공허함을 느껴 술자리를 기피하는 마음을 가지다가, 최근에는 술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탄산수처럼 가볍게 마시는 정도로 생각하면서 술자리에 참석하고 있어요.     


  그리고 일상을 잠시 벗어난 술자리에서 만난 지인들에게 알코올을 통해 세상사에 관대해진 틈을 타 술과 일면 유사한 효능을 가진 요가를 지속적으로 권하고 있어요. 술을 마시면 살이 찌지만 요가는 살이 빠질 확률이 더 크다는(요가 수련 후 식욕이 올라와서 반드시 살이 빠진다는 장담은 못 합니다....) 이점도 함께 말하고 있지요.      




  그래서 제가 술자리에서도 보고 싶을 만큼 호감인 사람들이 각자 요가원에 등록하고, 각자 요가 수련 후 말간 얼굴로 만나 천진난만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요즈음의 작은 소망입니다. 그리고 요가원에서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를 듣고, 미숙하거나 경솔하거나, 잘 몰라서 자책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을 불러주는 그 한 소절만으로도 충분한 마음이 드는 순간을 느껴보는 것. 그것이 지난한 동시대를 함께 버티고 있는 친밀한 지인들에게 제가 건네는 위로의 방편이지만, 그럴수록 저는 '요친자'로 거듭나고 있지요.   


  그리고 이러한 위로에 대해 구구절절 말할 것도 없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세분과 함께 편지를 주고받으니 만나지 않았어도 늘 함께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발설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편지 쓰기를 시작하였다면, 편지 주고받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상대에 대한 내밀한 연결성에 놀라고 있습니다.        


  현아 언니는 지난번 편지에서 ‘나약함’에 대해 말하겠다고 미리 언질을 주었지요. 언니의 고시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새록새록 그 시절이 떠올랐어요. 특히 온 교정에 가득 들어선 황금빛의 은행나무는 곧 1차 시험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전령사였고, 그토록 찬연하게 전하는 소식에 몸서리치던 그 시절의 감각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저는 나약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언제나 나약함이 제게 달콤한 타협의 말을 건네고 있지요. 언니의 ‘나약함’에 대해 들으면서 저의 나약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려고요.


언니 편지 기다릴게요!




[사진 : 안나현 作, call me by my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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