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나현

by 오늘도 나마스떼

지선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일주일 남짓의 시간이 흘렀는데, 그동안 많은 일이 일어나 어떻게 편지를 시작해야 하나 평소보다 여러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습니다.


난생처음 첫눈을 폭설로 맞이했고, 생애 최초로 헌법 교과서와 영화에서만 보던 계엄이 선포되는 것을 봐서 정말 오랜만에 헌법과 계엄법을 살펴봤습니다. 헌법과 계엄법에서는 계엄 선포의 요건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오독으로 인해 혐오와 정쟁이 증폭되는 도화선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겨울에는 오랜만에 태백산에 올라 상고대를 봐야지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위의 모든 나무가 눈꽃을 피웠고, 거리는 설원이 되어 있었어요. 퍼붓는 장대비 못지않게 눈이 푹푹 쌓이는 밤도 제게 설산의 추억을 방울방울 일으키게 하네요.


어릴 적부터 현재까지 저는 나름의 기준으로 현실적인 선택을 하면서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지선 선생님의 질문을 받고 보니 제가 '다른 선택을 한 순간'이 떠올랐고, 이번 편지에는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중학교 일 학년 때와 대학교 일 학년 때, 이렇게 두 번의 사춘기를 겪었어요. 침잠형(?) 사춘기라 외부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 시절에는 누워서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때 봤던 벽지의 무늬와 천장을 가로지르는 저녁 어스름을 배경으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지금도 선명히 재생됩니다. 그래서 그때 들었던 노래를 지금 들으면 미약하나마 울렁거리곤 해요.

중학교 때는 혼자 자전거를 타면서 발산했다면, 대학교 때는 산악부 활동을 하면서 나름 발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학을 다니기 위해 상경을 했지만, 저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애송이였고, 가족과 친구들은 구만리 넘게 떨어져 있어 메아리처럼 아련하게만 느껴졌어요.

그리고 학교 공부가 재미없더라고요. 당시 법전과 교과서에는 제가 해독할 수 없는 한자가 난무해 교과서를 제대로 읽지도 못한 채 시험을 치기도 했어요. 판례와 법 조문에 능숙해져 최대한 복사기처럼 써내는 것이 공부를 잘하는 방법이었는데, 남이 쓴 글(판례)을 끝도 없이 베껴 써야 하는 일이 당시로서는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어요. 참신한 표현을 하려고 국어사전을 뒤적이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 법전을 재빠르게 넘기면서 해당 법조문을 잘 적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더라고요.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렸지만 달콤한 젖과 꿀은 언감생심이었고, 이방인의 감정을 가진 채 교정을 떠돌고 있는 제 모습이 생경했어요. 마침 간섭하는 부모님도 없고, 대학 친구들도 단번에 친해지기 어려우니 저는 현실을 회피하고 속세를 떠나는 방법으로 산으로 쏘다니는 방법을 택했지요.


처음 일 년은 속세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는 일도 참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박 2일로 산행을 다녀오고 나면 근육통에 시달려 2~3일은 다리를 절뚝이면서 수업을 들으러 다녔고, 몸에서는 파스 냄새가 진동했어요. 분명 법학과로 입학했지만, 체육학과로 전과한 느낌이랄까요.


배낭에 텐트와 음식을 나눠서 짊어지고 산을 오르자니 배낭이 무거워 몸을 뒤로 잡아당기는 느낌이었고, 다리는 초입부부터 후들거려 경치를 감상하기는커녕 한발 한발 떼는 것이 천근만근이었어요. 텐트 치고 코펠로 음식을 만드는 일도 서툴러 선배들의 잔소리는 늘 달고 살아서, 잔소리를 한 귀로 듣는 흘리는 기술은 이때 익힌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이 모든 것을 망각할 수 있을 만큼, 휴식 시간이 돼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 풍광들은 빈 마음을 채워줬고, 삼시세끼 밥을 해 먹고, 텐트와 대피소에서 잠을 자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산악부원들은 차츰 가족 같은 친근감과 안정감을 선사해 줬어요. 처음 일 년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산을 다녔다면 그 이후에는 공식적인 산행 일정이 없는 주말에도 친구들과 후배들을 꼬셔서 산행을 다녔어요.


기말고사 마지막 날 시험을 치른 직후 산행을 떠나는 일정이 잡혀있어서 바로 산행을 떠날 수 있게 등산복 차림으로 시험을 보고 바로 산행을 떠나기도 했는데요. 당시 같이 시험을 본 친구들은 저를 뜨악한 느낌으로 봤고, 아무도 저를 견제하지 않았지요.




대학 축제를 앞두고는 토너먼트로 축구대회를 열었는데, 법대 대표로 축구경기를 마친 후 바로 축구화를 등산화로 갈아 신고 야밤에 혼자서 헤드랜턴 켜고 북한산 야영장까지 올라 늦은 저녁을 먹기도 했어요. 화려한 도시의 야경을 등진 채 칠흑 같은 산속으로 짐승처럼 온몸의 감각을 깨워 올라가는 시간 동안 홀로 존재하지만 온전히 살아있는 느낌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겁도 없이 산을 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는 그동안 눈독 들이던 60리터 아크테릭스 배낭을 샀는데요. 매장에서 배낭을 양도받아 어깨에 메는 순간 뛸 듯이 기뻤는데, 물건을 사서 최고로 기뻤던 순간을 꼽으라면 그때라고 할 수 있네요. 지금도 방 한구석에 고이 모셔둔 그 배낭을 보고 있자면 땀과 흥분이 뒤엉켜 그 배낭을 씩씩하게 메고 팔도강산을 누비던 제 모습이 환영처럼 다가옵니다.


명절이면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곤 했는데, 점차 저는 시커먼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내려가기 시작했고, 내려간 김에 경주 남산, 영남 알프스 등의 산행 일정을 짜서 돌아다녔어요. 이렇게 열심히 산행을 다니자 선배들은 3학년이 되는 저에게 산악부 대장을 하라고 했고, 저는 기꺼이 산악부 대장이 돼서 방학 때 해외 산행도 가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는데요.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위험(?)을 감지한 엄마는 대구에서 짐을 싸들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와서 저에게 산악부 대장만은 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였지요. 그러나 이미 결정을 내린 저는 요지부동이었고, 엄마와는 한동안 입씨름을 하다가 "산악부 대장을 하면 저에 대한 모든 경제적 지원을 끊겠다."는 엄포를 놓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큰 반항 없이 고분고분하게 말을 곧잘 듣던 제가 대학에 오면서부터는 나름 독립을 했다는 마음에 엄마한테 작은 반기를 들었던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대립했던 적은 없었는데요. 그때 저는 경제적 지원을 끊는다는 엄포에 굴복해 눈물을 머금고 산악부 대장을 하지 않고 얌전히 3학년 생활을 마친 다음 신림동으로 가서 고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음... 그 당시의 마음으로는 하루빨리 시험에 합격해서 다시 산행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강했고, 그때 가고자 했던 히말라야 산맥도 합격하자마자 기필코 가겠다는 마음이었는데요. 그로부터 약 5년이 흘러 고시에 합격했고, 그 시간은 저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어서 합격한 기념으로 오른 히말라야 산맥에서는 고산병과 기침에 시달려서 하루하루 내려갈 날만 손으로 꼽으면서 산행을 했지요. 그리고 지금은 계양산만 가도 숨을 헥헥거려 다시 내려갈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어서 예전에 산악부였다는 말은 놀림거리가 되고 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적절한 타이밍'에 산꾼이 되고자 했던 저를 공부의 길로 이끌어 주었고, 지금 제가 직업인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어요. 그 당시에는 산악부 대장이 되고 싶었지만, 그때 저를 말리고 공부하라고 채근해 준 것이 지금 생각하면 저를 하루빨리 산속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한 변곡점'인 것 같아요.


현아 언니도 분명 저처럼 현실로 돌아오게 한 변곡점이 있겠죠?

편지가 더해질수록 서로의 과거사가 환하게 밝혀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진 : 안나현 作, That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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