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루를 채우는 요령

지선

by 오늘도 나마스떼

완연한 가을이 등을 보이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올해 가을은 그 그림자가 유독 긴 느낌이네요.


어린 시절 시골에서 가을을 보낼 때의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그 당시(30년 전쯤) 시골 사람들은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식재료 중에 말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을 모두 말려두려 했답니다. 저는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면서도 농한기를 조금 더 풍요롭게 보내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신성하게 느껴져서 그 일련의 과정들을 어떤 의식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태양 볕과 건조한 바람에 하루가 다르게 비쩍 비쩍 말라가는 식재료들을 관찰하면서 ‘이 할머니네 집에서는 이런 것까지도 말리는구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온 동네를 둘러보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잘 깎은 감을 말려서 곶감을 만드는 것은 너무도 평범한 일이었고, 손가락 길이로 토막 낸 무, 여린 무청, 표고버섯, 호박, 토란대, 대추, 도정하기 전의 벼, 홍고추 등 이 모든 것들을 양철지붕 위나 마당에 각자의 취향이 드러나 있는 정원처럼 울긋불긋 펼쳐두고 그 자리마저도 부족하면 길가 한쪽까지 빌려 널어두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가을엔 말릴 수 있는 자리 사수하기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었답니다.


그 당시 저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서 저녁 이슬이 내리기 전에 마른 농작물들을 다시 자루에 집어넣는 역할을 하곤 했는데요, 아버지가 벼농사, 고추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그 양이 꽤 되었습니다.


매해 수십 자루씩 수확한 농작물들을 담으면서 효율적으로 자루를 채우는 방법에 대한 요령을 깨우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루를 자주 흔들어서 담아라!’입니다. 위아래 좌우로 계속 흔들면서 내용물을 담아야지만 아래층부터 밀도가 고르게 채워지면서 같은 자루라도 더 많은 양의 내용물을 차곡차곡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지금 생각하면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야무지게 자루를 잡고 흔들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그려져서 웃음이 나오기도 하네요.




지금 제 작은 머릿속을 하나의 자루라고 생각한다면, 하루 종일 또는 며칠간 있었던 삶의 복잡한 일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보관하는 데 있어서 그 시절처럼 반복적인 흔들림 같은 것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달리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밥을 먹는 것은 까먹어도 달리기만은 꼭 해야 한다는 집착을 가지고 있답니다. 주변 사람들이 늘 걱정하지만 시간이 없을 때는 새벽 한 시에도 가끔 나가서 5~10킬로 정도를 뛰고는 합니다. 도저히 내 머리와 마음속에 욱여 담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던 때에는 새벽 네 시까지 뛰고 있는 저를 발견한 적도 있었으니 달리기가 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짐작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면을 박차는 일정한 리듬에 몸이 위아래로 콩콩 흔들리고 양팔은 앞뒤로 열심히 저으면서 진자운동 같은 반복적임 움직임이 머릿속을 차분하게 정리해 주는데요, 이리저리 흩어졌던 경험과 감정들이 컴퓨터 조각모음을 하는 것처럼 한데 분류되어 머릿속 기억장치 속으로 켜켜이 잘 저장되는 것 같습니다.


다능 선생님이 맑은 정신으로 삶을 건강하게 지켜 나가기 위해서 수면시간만은 꼭 확보하려고 노력하시는 것처럼 저는 어떻게든 달리기를 가능하면 매일, 또는 되도록 자주 하면서 가라앉을 것들은 모두 아래로 가라앉히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공간을 확보해 두려고 합니다. 하루라도 빼먹게 되면 어딘가 당장 넘쳐흐르거나 머릿속이 엉망진창의 창고처럼 되어버릴 것 같은 강박이 들기도 하죠. 마음의 넉넉함 같은 것도 여기서 비롯되지 않나 싶어요.


그리고 수확한 작물들을 곰팡이가 피거나 썩지 않게 좋은 볕이나 바람에 말려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드는 행위는 요가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날 하루 경험한 사건들이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루는지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탈바꿈되어 기억되듯이, 요가는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오랜 시간 평안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적당한 형태로 가다듬어 주기도 하고 머릿속이 상념들로 끈적거리지 않게 뽀송뽀송 건조해 주기도 하니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기질적으로든, 아니면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격 때문이든 각자의 ‘나약함’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잘 컨트롤할지가 어른의 숙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아 님이 나약함을 다루었던 이야기를 읽으며 저에게도 잔소리를 끊임없이 해줄 수 있는 독서실 원장님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누군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를 해주기에 나이를 꽤 먹어버려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나현 님의 음주 역사와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저 또한 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술에 얽힌 에피소드를 함께 떠들며 웃고 싶었답니다. 특히 요가 수련을 할 때 골반이 잘 안 열린다는 이유로 어려서 술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는 면박을(?) 들을 때마다 그게 아니라 달리기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렇다고 당당하게 변명하지 못해서 속상했던 일들을 말씀드리며 위로받고 싶기도 했답니다.


애주가답게 20대 때는 직접 담금주를 만들어서 먹기도 했는데, 그 발단은 시골에서 부모님이 농사를 지어 과일들을 보내주시면서부터입니다. 그 양이 꽤 많았는데 나눠 먹기에는 품질이 시중에 유통되는 잘생기고 반반한 과일 답지는 못했고 혼자 먹기엔 많아서 그 귀한 것들을 썩혀 버리지 않으려고 술로 담그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부모님이 알게 되시면 얼마나 한탄하실지... 아마 끝까지 비밀에 부쳐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의 담금 과실주의 역사를 돌아보자면 다행히도 대부분이 확실히 성공적이어서 그 맛이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단 한번 실패의 쓴 맛을 봐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머루 포도로 포도주를 담근 일이 있었는데 포도주는 당도가 22 브릭스 이상을 넘지 못하면 술이 아닌 식초가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때 그 포도는 22 브릭스라는 달콤함의 기준을 넘기지 못해서 식초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 결과가 너무 가슴 아픈 나머지 SNS에 하나의 자기 계발 감성글을 올렸었는데요, 그 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도 자신의 어떤 임계점을 넘지 못하면 이도저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내 포도주가 22 브릭스의 당도를 넘지 못하고 식초가 되어버렸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 년 정도가 지난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면 한 해 동안 직접 만든 건강한 식초를 먹을 수 있어서 참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때는 간절히 원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아서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다 싶은 일들이 분명 하나씩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요가를 만나게 된 과정들도 그랬고요, 아마 계속 승승장구했다면 평생 요가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현재의 욕망에 따라 무엇인가를 간절히 염원한다거나 실체 없는 대상에게 소원을 비는 일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현 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까요? 그때는 정말 간절히 원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싶은 일들 말입니다.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로요.


나현 님의 답장은 설레는 첫눈과 함께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모든 분에게 하루하루가 더 설레는 겨울이 되시기를 바라봅니다.



[사진 : 이지선 作, 시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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