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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나마스떼 Sep 22. 2024

한 다리 걸치는 요가

지선

안녕하세요, 나현 님!     


어제는 잠들기 전에 한 주의 날씨를 검색해 봤어요.

이번 주 내내 장마기간으로 비가 올 거라는 예보에 우중충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일어나 보니 파란 하늘이 반겨줘서 어찌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예측 불허의 기쁨이란 마음에 더 깊게, 불쑥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런 마음과 일맥상통하는 걸까요? 서신 교환을 메신저가 아닌 이메일로 전송하고 싶다는 나현 님의 생각에 글 쓰는 순간이 한결 설레게 느껴지네요.     


비에 얽힌 나현 님의 이야기를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그 이야기에 동화되어 오감이 살아나면서 빗방울이 온몸을 노크하는 것처럼 느껴지자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몇 년 전, 요가 수업들이 대폭 축소되고 운동 시설 영업제한까지 이르게 되면서 먹고사는 길이 요원해졌어요.


요가 강사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을 해야 할 시기에 기약 없이 모든 수업을 쉬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아찔하고 무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몇 달 지속되자 커피 한 잔을 사 마실 마음의 여유도 없게 되지 뭐예요.

(그래서 스*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게 느껴지네요.)


이때 운 좋게 경기도 양평의 깊은 산속 사찰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템플스테이를 온 방문객들에게 요가수업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때가 정확히 이맘때였어요, 7월 중순의 장마 시작이었죠.


전날 밤부터 내리는 비로 산중이 습기를 가득 머금은 채 숨 쉬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의 호흡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온 산이 몸통 전체를 들썩거리며 숨 쉬는 게 요가의 완전 호흡과 비슷한 느낌이었죠.


거기에 요란한 빗소리가 더해져 아랫마을과는 완전히 차단된 하나의 섬이 완성된 것 같았어요.     


그 소란스러운 고요함을 뚫고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어 보이는 앳된 여자아이의 하이톤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사실 그 목소리가 이 산중 사찰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속으로 조금은 구시렁거렸습니다.     


시종일관 무표정인 엄마 아빠 앞에서 재롱을 부리듯 꺄악꺄악 거리는 소녀에게 사찰 예절이 무엇인지 당장이라도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까요! 분명히 외동딸에 귀여움을 잔뜩 받고 자라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런 생각 중에 그 일행의 예약을 받은 보살님이 다가오셔서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어요.     

'며칠 전에 오빠를 사고로 잃고 장례식 후에 부모님이 너무 힘들어하셔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참가 신청을 했다고 합니다.’     


마음에도 무릎이 있다면 저는 그날 진정한 하심(下心)의 상태, 마음이 완전히 무릎을 꿇고 낮아지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함부로 누군가를 평하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하고 살아왔지만 누구보다 편견으로 가득 찬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지요.     


푹 젖은 고무신을 끌고 그 가족에게 사찰 안내를 해드렸습니다.


요가를 하다가 어떤 고통스러운 감각을 마주했을 때 그 감각과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한데, 그날 발의 젖은 감촉이 제 감정의 시선을 돌릴 수단이었던 것 같아요. 그 부작용으로 저는 그 참방거리던 잔디밭과 고무신 가득 질척거리던 축축함을 평생 잊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말이에요.     


절에는 죽음과 관련된 장소들이 아주 많기에 피해 갈 수 없는 이 주제를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아 그저 담백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저녁 요가수업에서 뵙겠다고 말씀드리고 사찰 안내를 끝냈지요.     




제 요가 수업을 듣는 나현 님에게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가 요가 강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 수업의 관심사는 오로지 ‘나’였습니다.


모든 강사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수업을 하지는 않을 테지만, 말을 더듬는다거나 별다른 실수를 하지 않고, 얼마나 이 수업을 깔끔하게 이끌지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지요. 이 마음은 수업을 시작하고 일 년 정도가 지나서야 타인을 볼 여유로움이 생기면서 조금씩 바뀌게 되었어요.


학생들에게 조금 더 다가가서 자세를 수정해 주고 개개인에 맞는 지도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타인을 말 그대로 ‘보게 됐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히 타인을 위한 요가를 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요가 계율에는 권계(Niyama)와, 금계(Yama)라는 것이 있는데, 요가를 할 때 해야 할 것,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 놓았다고 보면 됩니다. 금계(하지 말아야 하는 것) 중에서 Asteya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뜻인데요.


그동안 저는 회원님들의 시간을 도둑질하지 않는 내가 되기 위해 책임을 다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온전히 타인을 위한 요가 수업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왜냐하면 그 안에 여전히 ‘자신’이 존재했기 때문이죠.     


장맛비가 온 산중을 두들기던 몇 년 전 그날에서야 처음으로 타인을 위한 요가를 했습니다.


인내심을 요하는 자세에서 순수한 응원을 보내고, 사바아사나에서 아로마를 발라드리고 어깨를 가볍게 풀어드리며 진심으로 이 가족이 평안하기를, 그들의 어깨를 한 번씩 꾹 눌러드리며 기원하고 또 기원했어요.     


그날 이후로 저는 회원님들의 몸을 터치할 때 속으로 계속 말을 거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들의 한 달이, 혹은 일주일이, 혹은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순수한 응원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고요.  이 반 평의 요가매트 위에서 무엇을 위해 바로 서려하는지, 무엇을 붙잡고 혹은 무엇을 내려놓으려 하는지 짐작도 못하겠지만 말이에요.      


“선생님이 제게 핸즈온 하실 때 꼭 말을 거는 것 같아요.”라는 나현 님의 말에 속으로 굉장히 놀란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디선가 타인의 무의식을 가장 무의식적으로 기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직업이 무당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현 님과 처음으로 프랑스 가정식을 먹으면서 했던 대화가 떠오르네요. (나현 님과 밥을 먹은 것도 처음, 프랑스 가정식이란 걸 먹어본 것도 처음이에요)     


변호사라는 직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한을 풀어준다는 면에서,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승리나 물질적 이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지라도 위로는 된다는 점에서 무당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어쩌면 정말로 나현 님은 무당과 가까운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간 현아 님, 나현 님 두 분이 주고받은 글을 보면서 요가에 대한 진심이 저보다 더 깊게 느껴져서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이 아름다운 대화에 내가 끼어들어도 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요. 직업이 아닌 순수한 열정으로 요가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에 내가 끼어들어서 그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강사와 회원 사이에 한 시간이라는 수업 시간(또는 제한 시간이라고 표현해 볼게요) 동안 서로의 눈빛과 아사나를 통한 대화를 나누지만 진짜로 내 생각을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글을 나눈다는 것이 정말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아서 한 다리 무겁게 걸치는 것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답니다.     


요가 아사나 수련이라는 것이 본래 한 다리를 반대쪽 다리에도 걸치고 목 뒤로도 걸치고 여기저기 잘 걸쳐야 하는 것이 미덕이기 때문에 이 대화에도 잘 걸쳐보겠습니다!     




그렇다면, 현아 님!

요즘 현아 님과 같이 요가를 나누고 계시는 강사 선생님에 대해 궁금해지네요.


어떤 대화들을 나누는지 조금 더 듣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조금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진 : 이지선 作,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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