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스 프로젝트(2)

[오늘도, 사람!]

by 별체



담임선생님이 여름방학 공부계획표를 짜오라고 했을 때, 친구 진은 A4용지에 원 하나를 그려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었다. 왼쪽 반원에는 공부를 적었고, 오른쪽 반원에는 수면 및 기타 등등이라고 적힌 계획표를 본 선생님은 그녀에게 꿀밤을 날렸다.


“반항하냐? 시계를 그릴 거면 시간이라도 표시를 하는 정성을 보여.”

“아, 쌤!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일어나는 시간도 다르고, 맨날 하고 싶은 공부도 다를 텐데 그걸 어떻게 미리 예측합니까.”


“시험 볼 때도 컨디션 따라 풀고 싶은 것만 풀래? 규칙적으로 생활하라고 계획표 짜오란 거잖아, 인마.”

“딱 보면 모르세요? 절반으로 나눴잖아요. 어쨌든 하루에 12시간은 공부한다는 뜻이죠.”

“네가 퍽이나 그러겠다. 입만 살아가지고는. 무슨 공부를 얼마큼 할 건지, 다시 짜와.”


이렇게 진의 계획을 세우는 능력은 이미 경험한 터였다. 그녀가 짜온다는 가수 되기 프로젝트, 일명 이노센스 프로젝트에 별 기대가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유명해지고 싶어서 가수가 되고 싶다는 진의 말에 남은 믿음까지 싹 사라졌던 나는 그녀가 내민 계획표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계획표에는 무엇을 얼마나 해야 할지, 돈을 얼마나 쓰게 될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물론, 5분, 10분 등의 자잘한 스트레칭 시간까지 적혀있었다.


그러면서도 부모님 몰래 나와야 하는 고등학생의 처지를 생각해 하루 총연습시간이 4시간은 넘지 않게 계획되어 있었다. 계획표 옆에는 깨알같이 부모님에게 댈 핑계까지 적혀 있었다.


‘엄마한테 독서실 간다 하고 나오기 or 친구랑 같이 공부한다 하기, 이때 서로 부모님 전화받아줄 것.’


가수가 되고 싶던 이유야 어찌 됐건, 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었다. 평생 계획을 세우고 행동해 본 적이 없다던 진, 그녀는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난 프로계획러였다. 이만큼 세세한 진의 계획표를 보고도 못한다고 말하면, 진은 분명 날 죽이려 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그녀의 계획에 동참하게 된 나는 여름방학이 시작된 다음 날, 마포구 문화센터 앞에서 딱 죽고 싶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제부터 한 달 동안 수강료 3만 원을 내고 문화센터의 방송댄스 수업을 들을 예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으로 하는 대부분의 것을 못했기에, 끔찍하게 못할 나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


“우리 꼭 춤까지 배워야 돼?”


나는 교실 앞에서 쭈뼛거리며 조용히 진에게 말했다. 진은 여기까지 와서 약한 소리 하지 말라며, 나를 질질 끌고 들어갔다.


한쪽 벽면이 모두 전신 거울로 메워진 교실에 잔뜩 몸을 움츠리며 들어섰다. 수업이 10분이나 남았는데도 벌써부터 스무 명 가까이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 인원수에 한 번 놀라고, 사람들의 연령대가 너무 제각각이라 두 번 놀랐다. 우리 또래부터 20-40대 성인은 물론, 유치원생, 초등학생과 그 어머니들이 한데 어우러져 각각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에 이렇게 춤추고 싶은 사람이 많은가 싶었다.


한 달 단위로 수강신청을 받는 문화센터의 수업 특성상, 분명 오늘이 수업의 첫날인 것이 분명한데도, 이들 중에서 정말 처음 참여하는 사람은 나와 진뿐인 것 같았다.


그들은 들어오는 선생님과 자연스럽게 안부를 나눴고, 선생님은 콕 집어서 나와 진을 가리키며 처음 오시는 분들 반갑다고 말했다. 그 인사에 더욱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나의 못난 춤 실력을 단번에 들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말리는 진의 성화에 교실 맨 뒤 구석에 겨우 섰다.


한 달 동안 아이비의 A-HA를 배울 것이라는 선생님의 간단한 설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됐다. 춤을 배운다는 건 잘하는 사람의 동작과 내 동작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견디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알려준 동작의 반의반도 따라 하지 못했고, 1분 전에 배운 춤도 잠깐 다른 동작 배우고 오면 그대로 까먹었다. 그래도 국민체조나 새천년체조 같은 건 곧잘 배웠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방송댄스 선생님의 동작을 따라 하는 것과는 쥐뿔 상관도 없었다.


심지어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춤을 전혀 못 출 것 같았던 분들마저 수월하게 선생님의 동작을 따라 하는 것을 보자, 나의 몸놀림은 점점 더 소심해졌다. 이 교실에서 가장 못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아챈 선생님은 마지막 20분은 아예 내 옆에 서서 수업을 진행했다. 나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그저 도망가고 싶었다.


이런 나와는 달리 진은 신나 보였다. 한 동작도 어려운 나와 달리 진은 춤에 소질이 있어 보였다. 몇몇 동작은 가르쳐주자마자 한 번에 따라 하기도 했다. 물론 어려운 동작은 머리 한 번 긁고 헤헤거리면서 웃느라 바빴지만, 어쨌든 엉성하게라도 따라 하려고 애썼다.


나는 그런 진의 모습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못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건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수업이 끝나고 진에게 물어보자 진은 반대로 내게 물었다.


“몸으로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던데, 넌 그 와중에 생각이란 걸 했어?”


진은 자신이 잘하고 못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고 했다. 몸으로 하는 일에 생각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대답하는 그녀가, 너무도 그녀다웠다.


반대로 몸으로 하는 일을 하는 와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나도 너무 나 같았다. 나는 이럴 때마다 진의 단순함을 닮고 싶어 안달이었다. 필요한 순간에만 생각할 수 있는 그녀의 효율적인 두뇌와 나의 두뇌가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가 뭔가 못한다는 걸 알아갈 때마다 싫어 죽겠어.”

“다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알아, 그래도 싫어.”


가수가 노래만 잘하면 됐지 꼭 춤을 출 필요는 없다고 구시렁거리는 나를 데리고 춤을 배우느라 한 달 동안 진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업에 가지 않겠다는 나를 데리고 가기 위해 몇 번이나 우리 집 대문을 두드려댔다.


그래서 독서실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춤 배우러 다닌다는 사실을 엄마한테 들키고 말았다. 엄마는 일단 돈을 냈으니 남은 기간은 다 배우라고 했기에, 꼼짝없이 남은 수업에 참여해 매일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경험을 반복했다.


그렇게 한 달을 채우고도 나는 끝내 아이비의 춤을 모두 소화할 수 없었다. 특유의 뻣뻣함과 둔함을 극복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방송댄스 수업이 끝나면서 우리의 이노센스 프로젝트도 자연스럽게 무산됐다. 엄마에게 들킨 덕분에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진의 부모님 또한 무척 엄하신 분들이었기에, 진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 계획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나와 달리 진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뒤에도 진은 종종 배웠던 춤을 슬쩍슬쩍 추고, 가끔 체육관 뒤에서 노래를 부르며 아쉬워했다.


나는 그런 진을 보며, 그녀의 성격이 단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꿈까지 너무 쉽게 여긴 것 같아 미안했다. 물론 진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했지만.


그저 이노센스 프로젝트가 무산됐을 뿐이지, 우리가 이노센스인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라며 웃던 진은 끝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영화과에 진학을 했다.


아무리 해도 노래를 못 부른다며 자아성찰을 끝낸 그녀는 배우라도 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대학교에서 연극배우의 길을 걷던 그녀는, 결국 대학원까지 진학해 이제는 작은 극단을 운영하는 사람이 됐다.


시간이 지난 후 이노센스에 대해 물었더니, 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랑 노래방 많이 다니고, 춤 배우러 다녔던 것만 기억난다고 했다. 자신의 유치한 작명센스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필요한 것만 기억하는 그녀는 변한 게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의 두뇌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도 변한 게 없었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이노센스(innocence)를 검색해 보니 청순 말고 천진난만이란 뜻도 있었다. 그땐 마냥 어이없기만 했던 그 단어가 지금 보니 진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단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그런 진에 대해 적을 뿐이었다. 이노센스와 함께 진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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