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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함에 온도가 있다면

240116

by StarCluster

연말이 되면, 저물어가는 한 해를 생각하며 지난 시간의 나를 조용히 되돌아본다. 수평선 너머 지는 해를 보며, 떠오르던 아침과 중천에 찬란히 빛나던 시간을 떠올리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자연의 순리에서 배운, 삶을 대하는 공통된 태도이자 마음가짐일지도 모르겠다.


쉽게 이루어질 수 없기에 다짐이라 불리는, 그 만만하지 않은 것을 생각한다. 여기까지 잘 버텨왔지. 서로를, 스스로를 다독여보면서도, 1월에 다짐한 바를 모두 제대로 살지는 못했다는 후회, 변명, 합리화. 그래서 12월의 여운은 대체로 씁쓸한 뒷맛으로 남는다. 그러한 반성의 태도로 새로운 1월의 한 가운데 날을 맞아 새해의 다짐들을 몇 가지 다시 떠올려보았다.


결심한 다짐들을 모두 이루어낸 나는 얼마나 멋지고 훌륭할까. 너무 높게 설정한 다짐은 아닌지, 과연 올해 안에는 가능은 할지 등등.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반드시 되어있을거라 굳게 믿는, 모든 것을 다 성취하고, 다음 스텝을 밟아갈 진취적이고 이상적인 모습의 나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기필코 이루어야겠지 싶어, 꼭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싶어서,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한 나의 모습으로부터 자격지심까지 느끼는 내가 정말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를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이지 말자는 다짐은 매번 하면서도, 새해에는 왜 이렇게 잔뜩 기합이 들어가는지.




생기부 최종 점검까지 바쁜 학교 일정이 어느정도 마무리되면, 잠시 숨 고를 틈이 생긴다. 연초에는 학기 중 모아두기만 하고 미뤄두었던 여러 자료들을 정리한다. 학생들이 남긴 기록은 함께한 과거의 단면들을 소환하는 일종의 추억 스위치다. 그래서 마음을 먹어야 하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던 사회초년생 때 개설했던 사진부 동아리. 그 시간에 학생 활동 지도하면서 학기말 전시회 했던 자료를 발견했다. ‘아이들 데리고 학교 밖 사진 찍기 좋은 곳들 데리고 나갈 때마다 고생 좀 했었지-’ 역시나 시작되어버린 시간여행.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열심히 가르쳤다. 축제 때 각자 한 두 장씩 출품해 전시했던 사진들이 참 뿌듯했었다. 전시 일정 끝나고 동아리 대표 학생들이 앨범으로 만들어준 추억을 오랜만에 펼쳐보았다. 그 시절의 내가 앨범에 있었다. 그 사람은 모든 것이 어설펐다. 온 몸에 잔뜩 깃든 긴장감, 사람을 대하는 어색한 태도, 업무 흐름을 파악하는 미숙함 등등.


그때 그 사람은 ‘잘’은 살지 못해도, ‘열심히’는 살고 싶은 마음에 출퇴근 대중교통 안에서는 책을 꼭 손에 쥐었고, 노트에 무언가를 생각하며 끄적였다. 출근길, 지하철 5호선에서 내려 환승하려고 서 있던 버스정류장, 너무 손이 시려웠던 한겨울에는 책도, 펜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멍하니만 있는 게 싫어 기도를 드렸다. 오늘 하루 만나는 아이들과 동료 교사들의 순간들을 공감하고 그 삶을 위로할 수 있는 교사가 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버스를 기다리는 추웠던 정류장에서 뜬 눈으로 뜨겁게 기도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반복되는 교직생활의 쌓여가는 경력과 관성 속에서, 서툴렀던 열정, 완벽이라는 허상과는 조금 동떨어진 지금에 서 있다. 이제와서는 어떤 노련함이 가지는 보통의 온도가 있다면 미지근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에, 사람에 무던해진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 그러나 그대로 아무렇게나 흘러가버리지 않게,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과의 순간을 품으며, 때때로, 일순간만큼은 반짝이는 생기로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래의 나로부터 느끼는 부러움과

과거의 나로부터 느끼는 부끄러움

그 어디쯤에서 표류하지 않으리라고,


그러니 새해의 다짐들을 다시금 다잡고

오늘의 나로서 살아가자고,


그렇게 새해의 첫 달, 한 가운데의 날에서

또다시 새로이 다짐을 했다.




ⓒ 2015. StarClu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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