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엄마가 늦었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대기실에 앉아있는 여자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모든 여자들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내밀고 있었다. 그 배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고, 한 아이가 뛰다가 넘어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모르는, 알고 싶지 않은 세계가 눈앞에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 멍하니 서있던 내게 간호사가 태아 사진이 들어있는 산모수첩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가 뿌듯한 표정으로 사진을 한번 터치하자 아까 보았던 조그만 동그라미가 움직이면서 심장 박동 소리가 재생되었다. 그 소리에 대기실 여자들이 일제히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간호사가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양, 훈장이라도 달아주듯 산모수첩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어머니, 아기가 엄마 닮아 정말 예쁘네요.”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말에 너무 놀라 핸드백을 놓쳐 바닥에 떨어뜨렸다.
세상에, 어머니라니,... 내가 어머니라니.
일단 휴가를 냈다.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몰아닥쳤고 입덧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짐승처럼 냄새에 민감해졌고, 먹기만 하면 전부 토해냈다.
집에 널브러진 채 며칠을 보내면서 겁이 더럭 났다.
생각해야 해.
생각해야 해.
지금 잘 판단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곳으로 휩쓸려 갈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한 순간도 아기를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사랑도 결혼도 관심 없는 내가 아기를 낳는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필에게 알려야 하나?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나에게서 도망친 사람이다. 이제와 아기를 내세우면서 구차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떡한단 말인가?
내가 아는 것은 생명을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여자처럼 아기를 낳아놓고 무책임하게 버려서도 안 된다. 혼자 아기를 낳아 잘 키울 자신은 더 없었다.
이대로
내 자유도, 경력도, 미래도 무너지는 건가?
창밖엔 봄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날도 차가웠다. 이런 날에는 술 한 잔 해야 하는데.
씁쓸한 기분에 독한 술이라도 마시면 좋겠는데…
아, 술을 마시면 안 되지.
위스키를 따르려다가 짜증이 버럭 나서 컵을 벽에 던져 깨버렸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엄마도 이렇게 힘들었어요?”
내 입에서 처음으로 엄마라는 단어가 나왔다.
순간,
SF Land에서 본 앳된 소녀가 떠올랐다.
한 번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고 나니,
이상하게 그 소녀가 자주 떠올랐다.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의 아빠는 어떤 사람인지,
두 사람은 사랑했는지,
왜 나를 버려야만 했는지,
결혼은 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엄마를 떠올리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나는 혼자 아기를 낳아 기르기로 결심했다.
나는 미혼모가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삶일지 가늠이 가진 않지만 살아볼 것이다. 저축한 돈도 제법 되고 개인적으로도 투자한 유니콘 기업들도 있었다.
임신 5개월이 되자 입덧이 사라졌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는 데, 내 몸무게는 오히려 줄었다. 그래도 배는 눈에 띄게 나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계속 불러오는 배를 감추기는 어려웠다.
아기는 낳을 거지만, 업계에서 쌓아온 나의 경력과 위치를 허물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풍문의 주인공이 되는 건 싫었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아기를 낳고 싶었다.
사표를 제출하려던 날,
놀랍게도 대표가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도 두 아이 엄마인데,
그 정도는 알 수 있다고,
먼저 말해주길 기다렸다고.
독종에 일 중독자로만 알았던 그녀의 배려와 침묵이 고마웠다.
“아이를 낳으려고 사표를 내겠다고요?
그다음은?”
“아직 거기 까진 생각 해 보지 않았어요.”
“그건 당신답지 않네요.”
“나다운 게 뭐죠?”
“유 이사는 젊고 자신감 넘치잖아요. 위험을 감수할 줄도 알고 실패도 두려워하지 않죠. 엄마가 되는 게 어때서요?
당당해도 돼요. 똑똑한 사람이 왜 그래요? 힘들면 손을 내밀어요. 내가 잡아줄게요.”
그녀는 내게 사표보다는 휴직할 것을 권고했다. 절대 좋은 인재를 잃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한 걸까?
도망치려고만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모든 걸 알고 있을 뱃속의 아기에게 창피했다.
기술이 발달해 인생의 순간뿐만 아니라,
뱃속의 순간까지도 기억하게 된다면,
내 생각을 다 읽는다면,
나는 아가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급한 마음에 나의 분신에게 말했다.
“엄마가 잠깐 겁이 났어. 못 들은 걸로 해줘. 미안해.”
내 말을 들었는지 힘찬 발차기가 느껴졌다.
“그래, 그래, 우리 아기. 난 널 자랑스럽게 생각해.”
엄마도 나처럼 두려웠을까?
다 큰 어른인 나도 이런데, 어린애였던 엄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처럼 주변에 어른이 있었을까?
엄마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시 외곽에 자리 잡은 입양센터를 찾아갔다. 나이가 많은 수녀가 신청서라며 놀랍게도 종이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펜으로 나의 인적사항을 적었다. 수녀님은 생모를 찾고 싶다는 나의 두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셨다. 뱃속의 아기에게도 축원을 해주셨다.
나는 사표도 휴직계도 내지 않았다. 계속 일을 하기로 했다. 가능한 재택근무를 하면서 일할 수 있게 배려도 받았다.
화상회의 도중 쉬는 시간에 자동으로 아기용품 광고가 불쑥불쑥 나타나 민망할 때도 있지만, 뒤에서 수근 대는 사람들보다는,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체크!
사실, 임신하고 나니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더 많이 떠올랐다.
바쁘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먹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 어떤 날은 복숭아가, 어떤 날은 간장 게장이 먹고 싶었다. 하루는 혼자서 식당에 들어가 삼겹살을 3인분이나 먹어 치우기도 했다.
본능에 충실한 임신부였다. 이런 동물적인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생생한 증거니까.
“너를 탑재한 기분은 뭐랄까?
세상 그 어느 파트너보다 든든하고 정겹다. 너도 그렇지?”
엄마도 그랬을까?
내가 기억해 낸 순간 말고도 우리는 열 달을 함께 보냈다. 뱃속의 아기가 커 갈수록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녀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다.
그녀는 왜 나를 찾지 않는 걸까?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걸까?
산통으로 내가 입원하자 병원은 비상이 걸렸다. 진통은 밤새도록 이어졌지만 아기는 나올 기미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내가 임신중독증으로 위독하다고 했다. 늦은 밤 달리 부를 사람이 없어 대표에게 연락을 남겼다.
수시로 피를 뽑고 체크했다. 새파란 당직 의사가 이대로 아기를 낳으면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문제가 생기면 꼭 아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얼굴이 흑색으로 변한 의사는 최선을 다하겠다며 비장한 표정으로 분만실을 나갔다.
헐레벌떡 달려온 대표는 내 손을 잡았다.
‘어쩌면 내게 이 아기를 키울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현실을 깨닫는 순간, 진통이 왔다.
아악!
한 차례 고통이 지나간 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SF Land 시스템 안에서 아기를 낳고 싶어요.”
언젠가 내 아기가 나를 보고 싶어 할 때,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전해줄 수 있도록 남겨두고 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나와의 만남을 기억해 주기를 바랐다.
“유 이사는 정말 유별나요.”
그녀는 눈을 흘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내 아기가 인생의 첫 기억과 느낌을 떠올릴 때를 위해, 우리 만남의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만난 엄마를,
너도 언젠가 만나겠지?
이제 SF Land는 실시간 스트리밍 기술로 과거 경험이나 기억만이 아닌 현재 경험도 전송과 재현이 동시에 가능했다. 시스템 설치는 간단했다. 전용 고글을 쓰고 패치를 부착한 후 클라우드에 접속하면 된다.
이제 곧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 펼쳐질 것이다.
얼른 너를 보고 싶어. 너와 눈 맞춤을 하고 네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너의 앞날을 축복해 주고 싶어. 그렇게 나의 사랑을 온전히 전해줄게.
내 아기는 분명 씩씩하게 잘 살 거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엄마가 널 버린 것은 아니야.
내 아기, 사랑한다.
진통으로 울부짖는 와중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이지, 너무나 아팠다. 상상도 못 한 고통이었다.
엄마도 이렇게 아프게 나를 낳았겠지?
엄마! 엄마!
이마에 감촉이 느껴졌다. 누군가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보드라운 그 손길은, 따스했다. 내가 아는 우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달콤한 듯 은은한 그 향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열일곱 소녀, 아니 그 소녀를 닮은 여자가 내 앞에 있었다.
엄마? 엄마!
이건 꿈이 분명해.
“유 이사, 정신이 좀 드나요? 잠깐 기절했었어요. 아, 사람을 이렇게 놀래요.”
대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는 정말 놀랐는지 얼굴이 하얗다. 나는 고글은 벗은 채, 주렁주렁 의료장비를 매달고 누워 있었다. 꿈속의 그 여자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데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미소다.
“엄마? 엄마야? 엄마! 보고 싶었어.”
나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다.
순간, 다시 진통이 왔다.
아악, 너무 아파!
그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대표였다.
나는 그 손을 꽉 잡고 마지막 혼신의 힘을 쏟았다.
"으아앙!"
힘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눈꽃처럼 가냘프고,
눈물처럼 따뜻한 내 아기.
아기의 눈망울 속 내가, 나를 보고 있다.
그 눈 속에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
엄마?
"아가야, 엄마를 기억해 줘.
그리고... 엄마의 엄마도."
체크.
엠마
주소를 받아 들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엄마야, 보고 싶었어.'
꽉 안아주고 싶었다.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딸은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에서 살고 있었다.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건물마다 유명 회사들이 채우고 있었고, 거리에는 멋지게 차려입은 양복쟁이들이 가득했다.
딸도 그런 멋진 삶을 살고 있을 것이었다.
그곳은 내가 속한 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러니 불쑥 찾아가 벨을 누르고 내가 엄마라고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단 하루도 널 잊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잘 커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하나.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달라고 해야,
아니면 그저 보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지금 내 행색은 괜찮은가?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매일 그곳으로 출근했다.
잠시 외출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틈만 나면 블록을 돌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잠복근무라면 도가 튼 나였다.
하지만 딸은 집안에 꿀단지라도 있는지 요지부동이었다. 남편이라도 외출해야 하지 않나? 가끔 음식 배달이나 택배는 시키는지 문 밖에 상자가 쌓여 있곤 했다.
임신하면 잘 먹어야 할 텐데.
몇 날 며칠을 지켜본 나는 결론을 냈다.
딸은 혼자다.
옆에 가족이 없다.
입양한 부모도 다 돌아가셨다던데,
아기 아빠는 어디 있는 걸까?
설마?
아, 가엾은 것.
혼자 아기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얼마나 외로운 일인데…….
유진이라고 했다.
똑 소리 나는 이름이다.
내 딸 유진이 살고 있는 27층.
목을 꺾고 올려다보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화려하고 멋진 건물이었지만 서향이었고, 환기할만한 창은 작았고, 마당도 없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혼자 아기를 키우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나는 조직에 복귀했다.
출근 첫날, 그가 나를 불렀다. 국제 무기밀매 조직의 거점 보관창고를 찾아내는 작전이 있다고 했다. 그 자신이 오래도록 침투해 있었던 조직이었다.
전주 작전 이후 그도 의심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눈치챈 그들이 사라져 버리기 전에 작전을 끝내고 싶어 했다.
본거지는 평택 항을 끼고 있는 야산이었는데 경계가 삼엄한 그곳은 기계인간 사이언을 감지하는 보안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작은 칩이라도 발견되는 즉시 트리거가 작동되어 자폭시키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그가 어려운 용어를 들어가며 설명했는데, 쉽게 말하면 나 같은 순수한 몸을 가진 인간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내가 잠입해 보안장치를 무력화시키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특수기동대가 기습한다는 작전이었다.
이미 한 번 정보가 센 적이 있었기에 극도로 조심하는 눈치였다. 믿을만한 사람들로만 팀을 꾸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원하지 않으면 다른 임무를 줄 수도 있다고,
충분히 고민하고 답을 달라고 말했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을 마약에 빠뜨려 팔아넘기는 극악무도한 놈들이었다. 그들은 나쁜 놈들이었고 처벌을 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덮쳐 증거가 필요했다.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이 바닥에 나 같은 몸은 없다지 않나?
그리고 이런 일은 두둑한 위험수당이 따라온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보험금도 나올 거고. 어차피 돈 벌려고 돌아온 곳이다. 손녀가 태어나기 전 임무가 끝나는 것도 좋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번 임무만 마치면, 엠마의 어깨는 최고급 사양으로 해드리죠.”
성공하면 승진도 약속되어 있고 조직에서 입지도 다져 롱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내근으로 전환해야지 싶었다.
아무리 나랏일이라지만
점잖은 일을 해야지.
머리는 좀 아프겠지만
그래야 딸도 당당하게 만나야지.
어쩌면 손녀를 안아 볼 수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그는 나의 직속 보스였다. 나는 팀원으로 제임스를 요청했다. 제임스는 흔쾌히 달려왔다.
보스는 작전에 투입하기 전 특별 훈련 프로그램에 보냈다. 세상에서 태어나 가장 혹독하게 보낸 일주일이었다. 고강도 체력 훈련은 물론이고 위장술에 사격술까지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매일 저녁 온갖 보안장치와 기폭장치를 능숙하게 다루는 법도 배웠다.
“순수혈통 선배 덕분에 이게 뭡니까?
아니 나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데 왜 선배랑 똑같이 훈련을 받아야 하죠?”
제임스가 투덜거렸다.
“순수혈통이 아니라, 터럭하나 건드리지 않고도 강인한 이 몸 덕분이겠지. 그러게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했잖아.”
“엠마, 왜 이렇게 유식해지셨죠?”
“매일 저녁 따로 과외해서 그래. 제임스, 똑똑해지고 싶으면 나랑 같이 기계랑 친해지자고.”
“아뇨, 전 이미 반 기계예요. 더 이상 친해질 필요 없어요.”
작전 투입 전, 우리는 자유시간을 받았다.
제임스는 애인에게로, 나는 테헤란 로로 달려갔다.
딸이 있는 이십칠 층을 올려다보면서 보이스 메일을 남겼다.
열흘만 있으면 헤어진 지 30년.
유진아,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곧 널 만나러 갈게.
푸른빛이 남아있는 서쪽하늘에 하현달이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처럼 낮게 떠 있었다. 8차선 도로 건너편 낡은 상가처럼 보이는 건물이 그들의 본거지였다.
“방탄조끼는 입으셨죠? 적외선 안경도요?”
제임스가 각종 아날로그 장비들을 살뜰하게 챙겨 와 내게 주렁주렁 달려고 했다.
“이것도? 아, 이건 너무 무거운데. 몸이 날렵해야지.”
“그러면 이것만이라도 갖고 가세요. 제가 최신형으로 받아왔어요.”
그가 방탄과 적외선 안경 기능을 동시에 구사하는 모자를 씌어주며 말했다.
“아, 내가 들어가야 하는 건데. 신체발부 부모수지라고, 내 진즉에 그 말만 알았어도.”
“신체발부 수지부모.”
나는 픽 웃으며 정정해 주었다.
그리고 왜 이리 수선을 피우냐며 핀잔도 주었다. 실은 그가 긴장을 풀어주려 애쓴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스와 제임스는 골목 어귀까지 따라나섰다.
제임스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선배, 조심하세요.”
“뭘, 이렇게 비장해? 곧 볼 건데, 신호 보내면 늦지 말고. 타이밍이나 잘 맞춰와.”
건널목 신호가 바뀌었다. 뒤돌아보니, 어스름 속에 서있는 그들이 보였다.
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눈빛만 주고받은 채 헤어졌다.
나는 혼자 길을 건넜다.
어느새 달은 졌고 대기는 잔뜩 습기를 머금어 발아래 도로까지 축축했다.
길을 건너자 얼어붙은 세상이 나타났다.
다들 어디 있을까?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건물 앞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고 네모반듯한 콘크리트 건물에는 각양각색의 간판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왼쪽 구석에 보스가 알려준 네온 입간판이 보였다. 빨강, 초록 알전구가 돌아가며 점멸하는 장식이 달린 간판에는 놀랍게도 붓글씨로 ‘목욕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여긴 또 별세상이군.
보스가 알려준 대로 입간판 뒤로 오렌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녹슨 철문이 나왔다.
찾았다. 보안경비실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이런 낡은 건물에 최첨단 보안 장치라니.
이곳 어딘가에 마약에 쟁여져 있다고 했다. 이번에도 조직은 내게 마약이 있는 장소는 알려주지 않았다. 어차피 내 임무는 보안장치를 해제하는 것이었다.
경비는 쉽게 따돌릴 수 있었다. 그는 중무장을 했지만 주먹 한 방에 기절해 버렸다. 총 한 방 쏠 필요가 없었다.
어라, 너무 쉬운데.
최첨단 보안장치를 설치했다더니 그것 믿고 이렇게 허술한가?
잠깐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더 이상 업을 쌓지 않아도 되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어떤 방해나 제재도 없이 보안경비실까지 진입한 나는 보스가 등록해 둔 생체 정보로 문을 열었다. 나는 배운 대로 보안장치를 해제했다.
건물 밖으로 나온 나는 허공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건너편에서 빨간빛이 깜박거렸다.
이제부터는 특수기동대가 활약할 시간이었다. 보스와 제임스가 길 건너편 눈앞에 나타난 순간 나는 보았다. 두 사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특수기동대는 출동하지 않았다.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나는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오지 마! 오지 마!"
어쩐지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싶었다. 내부에 첩자가 있었던 것이다.
제임스가 길을 건너면서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아니야, 오지 마! 오지 말라고!”
그때, 바람이 불어왔고 모자가 날아갔다. 바람을 가르는 총소리가 들렸고
나는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가운 주차장 바닥에 누워 일찍 도착한 죽음을 기다렸다.
누가 그랬던가? 죽기 전 살아온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나는 그저 내 아기, 내 딸 유진의 눈빛만이 떠올랐다.
딸에게 마지막 목소리를 남기고 싶었지만, 방탄조끼 안쪽에 있는 볼펜을 꺼내기는커녕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디선가 아득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였다.
무언가 살포시 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남은 힘을 모아 눈을 반쯤 떴을 때 하얀 점들이 보였다. 검은 하늘에서 춤을 추듯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날처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흰 눈 사이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누구일까?
나는 꺼져가는 생명을 모아 올려다보았다.
거기,
여자아이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마지막 순간에 내 딸이 나를 찾아왔다.
내 딸 유진이가 두 눈에 우리의 세상을 담아왔다.
엄마가 늦었지?... 보고 싶었어.
유진아,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바로 그 순간.
같은 하늘 아래,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