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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Sep 22. 2021

도산공원의 아침



 아이와 함께 놀러 온 서울에서의 첫 아침. 우리는 숙소 근처의 도산공원을 산책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지내던 시절에도 이름만 익숙할 뿐 가본 적은 없었다. 호기심과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입구에 들어섰다. 압구정이라는 화려한 동네가 주는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예상과 달리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주민들의 작은 쉼터 같은 곳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이제 막 지어진 공원이 많아 모든 것이 새것이라면, 이곳은 벤치, 나무, 조형물, 운동기구 등 곳곳이 낡았지만 오래된 역사와 함께 자연스레 공존하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방문한 서울은, 하늘을 찌를듯한 빌딩과 휘황찬란한 건물이 주는 긴장감으로 더욱 낯설었다. 하지만 도산공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 친근하고 정겨운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커다란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을 한 바퀴 돌며 공원을 구경하다 운동기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공원마다 하나의 풍경처럼 당연히 존재하는 이곳을 아이는 늘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운동을 열심히 하면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한 어린이로 한 뼘 더 자란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잔뜩 신이 난 아이는 날다람쥐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녔고, 나는 그 뒤를 정신없이 쫓아다녔다. 이른 아침이라 운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각각 다른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연세가 있으시니 아무래도 운동은 어려우실 테지 하며 힐끔거리던 참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듯 우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어르신들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어쩐지 머릿속 생각을 어쩐지 들킨듯한 기분에 황급히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 이건 어떻게 하는 거야?"

 "그건 아직 다리가 닿지 않아서 하기 어려워, 다른 쪽으로 가보자."


운동기구에 올라서서 방법을 알려달라는 아이와 아침부터 몸을 움직이기 귀찮은 나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입을 삐죽거리던 아이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운동기구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슬슬 쉬고 싶어진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앉을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던 할머니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시더니 아이 바로 옆 운동기구에 앉아 능숙한 자세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운동을 하시려나 보네 하며 쳐다본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한참 어린 나도 도저히 해내지 못할 동작을 기계처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내 할머니는 보란 듯이 아이가 궁금해하던 운동기구에 앉았다. 얘들아, 이건 이렇게 하는 거란다 하고 무심히 가르쳐주는 느낌이랄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리는 급기야 우와 하고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이번엔 헛기침 소리와 함께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철봉에 두 손을 올렸다. 이 쪽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하고 바라봤더니, 마치 체조선수와 같은 폼으로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이와 나는 또 한 번 눈이 휘둥그레져서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흡사 곡예에 가까운 동작을 한참 보여주시던 할아버지의 그 의기양양한 표정이란. 서슴지 않고 다양한 동작을 휙휙 해내던 할아버지는 지치지도 않고, 흔들림 없이 자세를 유지했다. 방금 전까지 덩그러니 놓인 돌덩이 같던 두 분이 순식간에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조용히 앉아있던 분들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박수를 치기엔 뻘쭘하고, 너무 열심인 두 분의 모습을 계속 쳐다보기엔 또 민망해서 아이에게 이제 그만 숙소로 돌아가는 게 어떻냐 물었다. 좋아! 하며 저만치 달려 나가는 아이의 뒤를 따라나서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자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할머니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왼쪽으로, 할아버지는 옆에 세워둔 수레와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낙엽을 쓸며 오른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내가 꿈이라도 꾼 건가? 마치 무협소설에나 등장할법한 진정한 재야의 고수들을 만난 듯했다. 물음표로 가득한 장소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곳에 쭉 앉아 있으면 또 다른 생활의 달인들과 마주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묘한 공간이었다.



 '노인'하면 무기력함을 바로 떠올리던 나였기에 도산공원의 아침의 기억은 머릿속에 오래 남아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무색무취의 존재로 살아가는 게 노인들이라 여기고 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못난 선입견은 대체 나의 몸 어디까지 퍼져있는 것인지. 머리를 한대 세게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운동은커녕 산책도 거르는 탓에 늘 비실거리는 나보다도 더 건강한 삶을 사는 어르신들을 만난 날. 생명력 넘치는 아이의 에너지와는 또 다른, 연륜과 노련미 가득한 에너지와 잠시 마주한 신비한 순간이었다. 할 수 있는 일도 내일로 자꾸만 미루며 안이하게 살아가던 자신을 조용히 반성한다.

 


 한겨울 내리는 눈처럼 오늘도 나의 몸에 늙음이 하나 둘, 조용히 쌓여간다.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언젠가 나도 늙음을 마주하게 된다는 걸 안다. 우연히 재야의 고수들을 만난 이후, 나는 지금보다 좀 더 건강한 삶을 살고 싶어졌다. 몸을 움직이고, 씩씩한 마음으로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이 오늘의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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