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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Dec 06. 2023

낡은 정거장과 아이와 나


  나는 운전을 못한다. 뚜벅이로 산다는 건 많은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는 뜻이다. 대형 마트에서 직접 물건을 고르려면 남편이 있는 주말로 미뤄야 한다. 아이와 둘이서 근교 나들이는 불가능하다. 덥거나 추운 날 병원에 가야 할 때면 그 길이 얼마나 멀게만 느껴졌는지. 엄마가 된 이후 나는 사소한 것에도 자꾸만 미안한 사람이 되었다. 남편의 발령으로 우리 세 가족은 이름도 처음 듣는 시골에 뚝 떨어졌다. 주말 부부 생활이 드디어 끝났으나 그새 달라진 서로의 패턴을 맞추기는 어려웠다. 종종 날이 서고 뾰족해졌다. 싸우고 싶지 않아 서로 조용히 입을 닫았다. 각자 낯선 동네에 적응하기 바쁠 뿐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곳에서 아이와 보내는 하루는 길었다. 운전을 못하니 집 근처 모든 놀이터를 하나씩 섭렵했다. 그마저도 지겨워지면 도서관으로 향했다. 딸은 방긋방긋 잘도 웃으며 낯선 동네를 탐험했다. 나는 말라비틀어진 버섯처럼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았다. 짜증과 화를 번갈아 냈고, 불면증이 이어졌다. 다섯 살이 되면서 아이는 프로그램이 다양한 유치원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전교생 중 유일하게 한 시반에 끝나는 빠른 하원을 원했다. 한 명뿐이라 하원 버스 운행이 어렵다는 말을 들은 다음날부터, 나는 매일 정거장으로 향했다.


  시골 정거장은 조용하고 적막했다. 벽에 붙은 시간표대로 버스가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때마다 우주처럼 고요한 이 동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지금 당장 사라져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 나 자신이 마치 이 작은 동네를 떠도는 먼지처럼 느껴졌다. 우울함인지 외로움인지, 버거움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마음을 안고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작은 돌멩이 수천 개가 마음속을 굴러다녔다. 다독이려 애써봐도 돌멩이는 속도 모르고 더욱 열심히 굴러다니며 생채기를 냈다.


 한시 반에 만나는 아이는 늘 울상이거나 배고픈 상태였다. 엄마 옆에만 있고픈 아이. 밥을 먹지 않아 속을 태우는 아이. 호불호가 강하고 마음이 여려 유치원 적응이 힘든 아이. 함께 놀 또래 친구가 없는 것도, 자다 깨서 유치원 가기 싫다며 서럽게 우는 것도 모두 내 탓인 것 같았다. 정답 없는 육아에 매 순간 휘청거렸다. 청소를 하다가 텅 빈 집에서 소리도 내지 않고 울었다. 아이의 등하원 말고 도대체 내가 뭘 할 수 있나. 매일 무능함을 뽐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정거장은 시장 근처라 노인이 많았다. 정겨운 시골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나같이 무기력하고 초점이 없었다. 모든 것이 멈춘듯한 낡은 동네였다. 그들은 쓸쓸한 고목(古木) 같았다. 정거장에는 몇 그루의 고목이 늘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오직 아이만이 여름의 초록 같은 싱그러움을 뿜어냈다. 딸에게 정거장은 놀이터였다. 근처 문구점에서 스티커를 사거나 커다란 찐빵을 와구와구 먹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우리가 탈 버스는 어디쯤 왔나, 다음 버스에는 몇 명이나 타고 내릴까 상상했다. 하루는 공벌레를 굴리며 노는 딸을 향해 할머니가 물었다. 몇 살이냐, 너 혼자냐, 오빠나 언니나 동생은 없냐, 혼자는 외로우니 엄마에게 하나 더 낳아달라고 해라. 아이의 귀를 막고 싶은 질문이 이어졌다.


“저는 엄마랑 아빠랑 셋이 살아요. 저는 혼자 있어도 행복해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할머니는 쇳소리를 내며 웃었다. 솔직하고 단단한 말이었다. 살아있는 존재는 저절로 주변을 환하게 만든다. 딸의 대답에 할머니가 웃던 그 장면이 아마 정거장이 세워진 뒤 가장 생명력 넘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내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하는 엄마와 다르게 너는 야무지게 여물어가고 있었구나. 외로운 감정에 취해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낯선 동네에서도 행복을 찾아내던 아이. 행복은 특별하고 대단한 게 아니라고. 흘러가는 구름이나 낮잠 자는 강아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다고. 세상엔 온갖 모양의 행복이 있으니 엄마도 찾아보라는 듯했다. 달그락거리던 마음속 돌멩이들이 멈췄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버스를 타자마자 아이는 단잠에 빠졌다. 고른 숨소리가 가슴팍에 진동처럼 울려 퍼졌다. 퍼석한 나의 몸에 잠시 생기가 흐른다. 유치원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잠든 딸을 꼭 끌어안고 집 앞 정거장에 내렸다.


  우리는 이제 버스 도착시간을 어플로 알 수 있는 도시에 산다. 돌이켜보면 딸에게 많이 의지했다. 아이는 종종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엄마, 나는 내가 나인 게 좋아. 나를 낳아줘서 고마워. 아름다운 아이의 말은 내 마음속 꽃이 되었다. 싱그럽고 풋풋한 고운 꽃.

  

  나는 더 이상 행복을 미루지 않는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보고픈 사람들을 먼저 만나러 간다.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다. 마음속 돌멩이를 와르르 쏟아버리고 좋아하는 것을 가득 담는다. 아이에게서 배운 행복을 찾는 방법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 그 시간들이 그립다. 시골 정거장에서 매일 무언가를 기다리던 시간. 지루하면서도 온기로 가득했던 시간. 도착할 버스가 있고, 돌아갈 집이 있고, 그래서 하염없이 앉아 있어도 불안하지 않던 시간. 나비처럼 팔랑이는 딸을 보며 행복했던 시간. 낡은 정거장에 가득하던 다섯 살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옆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던 내 어깨를 조용히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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