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기억의 명부

by 별사탕

나는, 내 삶의 영역 안에서 사람들과 어떤 연결 고리도 없었고 감정의 교류도 없었다. 그걸 나는 나의 '영역 안'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내면 풍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영역 안'은 무척 적막하다. 한 줌의 바람도, 한 떨기의 진동도,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노란 빛이기도 하고 갈빛이 나기도 하는 무수한 모래 알갱이들로 뒤덮인 사막 한가운데 한 명의 신사가 서있는 장면과 같다. 그 신사는 늘 그 자리에 미동없이 서 있다. 그는 카우보이 모자처럼 생긴 넓고 굴곡진 챙을 가진 비단모자를 쓰고 있다. 손에는 모래바닥에 가서 닿을 것 같은 길다란 나무막대를 한 자루 들었다. 나무 막대는 철보다 강한 아프리카 흑단으로 만들어, 검게 윤이 나며, 표면은 장인이 한 칼 한 칼 깎아낸 투각 문양들로 지팡이 전체가 장식되어 있다. 막대기 속에는 한 자루 칼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속을 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막대기의 손잡이를 소매 속에 감춘 나는, 검은 장막으로 만든 트렌치를 걸치고 있다. 트렌치 위로 수놓은 꽃잎과 줄기들의 양각 연속무늬들은 등판에서부터 시작해 사방으로 뻗어나가면서 각 소매끝단 속으로 파고 들어가 다시 끝단 밖으로 올라와 있다. 그래서 꽃들의 무늬는 트렌치의 겉과 속 모두에 고르게 수놓아져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겉모습은 무겁고도 화려한 느낌을 준다.

그에 비하면 트렌치 안으로 보이는, 온통 주름이 잡힌 무명천으로 만든 홑바지는 소박하고 허름하기까지 하다. 트렌치와 같은 톤의 가죽장화를 신고 남자는 모래벌판 한복판에 그대로 선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의 시선은 땅을 향하지만 땅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모래벌판 너머, 그곳보다 더 먼 곳을 떠올리고 있을 가능성이 더 많다.

생명의 흔적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곳에 남자는 살았고, 지금도 거기서 남자는 살고 있다. 이 세계가 나의 ‘영역안’ 풍경이었다.


우연히 동창을 만난 적이 있다. 만났다기보다 목격을 했다. 백화점 쇼핑몰이 있는 지하 식당가였다. 나는 뷔페 대기석에 앉아 있었고, 동창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반짝하고 빛났을지도 모르는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는 계속 옆에 있는 여자에게 말을 했다. 그가 쓴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신경했고, 담담한 빛이었다. 마치 이현세의 만화에 나오는 마동탁과 같은 우울하지만 완벽한 표정이었다. 번들거리는 안경알 때문에 안경알 너머 그의 눈을 아무도 볼 수없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자였다. 그러나 진짜는 가지지 못한 자이기도 했다.

내 옆에도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막 내 여자가 된 여자였고, 그래서 나는 그녀로부터 신뢰를 얻어가야만 했다. 아침부터 백화점을 돌며 그녀가 들어가는 샵의 한 쪽에 앉아 그녀의 사교 활동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내가 필요할 때가 되면 그녀는 날 불렀고 나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매니저나 점주에게 주었다.

그런 것들이 신경 쓰였던 때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서슴없이 달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몇 명의 사람들을 거리에서 놓친 적이 있다. 놓펴서는 안 되는 그런 몇몇이 나에겐 있었다. 다시는 마주치지 않아야 할 인물들, 그 일들을 나는 가슴 속에 넣어두고 살았다. 이건 내 힘으로 없앨 수 있는 기억이 아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또렷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는 부표처럼 기억에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그걸 지우는 방법은 그들을 다시 만나는 방법 밖에는 달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왜 내 기억 속에 들어와 있는진 나도 모를 일이지만, 내 생각에 그들과의 후속 기억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인듯하다. 그들과 이어지는 후속기억을 만들면 머릿속에 있던 바로 앞의 특정기억이 지워지지 않을까, 우리는 기억의 연속선상에서 지금의 행동이 만든 기억이 앞선 기억을 희미하게 지우면서 종당에는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을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기억을 지워야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는 만날 수 없는 재회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버스 안내양, 다방 레지, 사창가의 창녀, 여관바리 같은 부류의 여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인적사항을 알지 못하며, 성명은 물론이고 나이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 딱 한 명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동네 다방레지 아가씨다. 무더웠던 여름에 찬물이라도 한 잔 얻어마시려고 친구들과 다방에 가서 커피를 시키면, 꼭 내 유리컵에는 설탕물을 타 주었던 아가씨였다. 여자의 은혜가 주는 의미가 무언지 알지 못하던 때라, 자랑삼아 동네 형한테 그 얘길 했고, 동네형은 어디 한번 그 다방에 가보자고 앞장섰고, 마지못해 나는 동네 형과 함께 그 다방에 들어갔다.

미스 리였던가, 미스 김이었나 기억나지 않는 호칭을 마구 불러제끼는 그 형의 목소리에 나는 이럴 거면 안 왔을 텐데 하는 후회막심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미쓰리'라고 해두자, 사장 아줌마의 목소리로 미쓰리가 아프다는 마담의 말이 안에서 터져 나왔고, 그래도 큰소리로 채근하는 형의 목소리에 미간에 주름이 잡힌 미쓰리가 결국 테이블로 불려 나왔다.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 그러면서 눈치 없는 형은 자꾸 자기한테도 설탕물을 달라고 했고, 미쓰리는 성화에 못 이겨 설탕물을 두 잔 내어왔다. 그 다방에서의 일은 그 뒤로 아무런 기억도 없다. 미쓰리와의 기억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그 형과 미쓰리의 뒷모습을 동네 여인숙 골목에서 봤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그게 다인 기억이 되었다. 그 형도 미쓰리도 그렇게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왜, 그 형이 아니라, 미쓰리가 만나고 싶은 것일까.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은 것일까. 당신의 마음을 내가 몰라서, 자랑했던 것이 일을 그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키워서 나도 많이 슬펐다고 말해 주고 싶은 걸까. 자꾸 그녀의 까만 가죽 치마가 눈에 밟히기 때문일까. 아니다, 가죽이 아닐 수도 있다. 가짜 가죽, 레자로 만든 까만색 치마를 입고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었던, 남다르게 큰 키와 육덕진 체구에 서구적인 마스크를 지녔던 미쓰리를 꼭 다시 보고 싶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 그녀를 다시 만날 수는 없다.

그런 종류의 사람을 재회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 동네형을 만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재회가능한 쪽은 미쓰리보다 동네형일 수 있다.

동네 형과 나는, 내가 잦은 데모로 학사경고를 받고, 집에도 못 들어가던 시절, 강제 징집을 당해 의정부 보충대로 잡혀가던 전날, 장위동 허름한 선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우리는, 해가 긴 여름 한창때였기도 했고, 술 마신 김에 저녁 8시가 넘어 드림랜드 뒤쪽을 돌아 들어가 꾸역꾸역 산을 기어 올라갔다. 산기슭을 오르자 해는 떨어지고, 산속은 금방 어두워졌다. 한두 명 앞서거나 마주쳐오던 사람들도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드문해졌다. 드림랜드 뒷산은 정상이 따로 있다기보다 한 구비를 돌면 능선을 따라 평지로된 오솔길이 나타났고 그렇게 산의 능선이 한줄로 평평하게 이어져 있는 걷기 좋은 정상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산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온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점심을 먹고, 12번 버스를 타고 의정부로 넘어가 보충대로 입소했다. 거기까지가 형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그리고 휴가를 나왔을 때, 형은 동네에서 사라졌고, 들리는 소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유로 감옥에 갔다느니, 형수들과 진창싸움 끝에 유산으로 한 몫 잡아서 강남으로 이사를 갔다느니 하는 거짓 소리들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나는 그런 소문들이 터무니없는 소리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미쓰리와 연결고리였던 형이 사라졌고, 그래서 미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런 식이다. 내가 다시 만나보고 싶은 사람, 그래서 꼭 다시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다.


"그때 왜, 나에게만 설탕물을 줬던 거야?"


그런 사람, 마음만 먹으면 연결고리들을 찾아들어가 언제든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미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을 간직하고, 머릿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이 기억을 새겨 둔 채 나는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기억의 밑바닥에서 신음해야만 한다. 몇 구비를 돌아 골짜기 사이로 굴러내려가 심연의 숲속 소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버린 형의 외마디 비명이 어둠이 내린 늦은 저녁 하늘을 한바퀴 돌아 저문 장위동 하늘을 검게 물들였던 그날 밤을, 얼마나한 시간이 흘렀다고 한들 내가 어찌 잊을 수가 잊겠는가. 검지와 중지로 전해져오던 그 따뜻한 체온이 아직도 고스란히 손끝에 남아있는데 말이다.

keyword
이전 05화5. 식스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