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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Feb 06. 2021

1200만원 부수기②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수 있어

너무 행사 얘기만 연달아하는 것 같아 쉬어갈 겸, 순서에 맞춰 2학기 수서 얘기를 해볼까 한다. 일전에 언급했던 세 번의 대위기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그에 버금가는 황당한 에피소드이다. 수서 과정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1편(1200만원 부수기①)에서 했으니 이번엔 에피소드 위주로 쓰려한다.




2학기에는 1학기에 비해 신경 쓸 부분이 많은 행사가 많았기 때문에 수서 목록을 여름방학 때부터 만들었다. 그리고 희망도서 신청을 받아 추가했고, 2학기에 상영할 영화 DVD도 구매하기로 했다. 분명 시기상 적어도 한 달은 넉넉했기 때문에 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업체에서 말한 납품 시기는 과할 정도로 늦었다.


당황했지만 애초에 일정을 넉넉하게 잡았고 그 일정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라 알겠다고 했다. 다만 늦게 들어오는 만큼 신경 써서 처리해줄 것을 당부했다. 지난번 업체에서 해온 데이터에 문제가 있어 직접 수정하고 다시 작업한 책이 꽤 여러 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 이번에도 500권이 넘는 책이 도서관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저번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려 업체 직원을 붙잡고 함께 검수를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상영을 위해 구매한 알라딘 DVD가 보이지 않았다. 보통 구입 때마다 많아야 5개 정도의 DVD를 구매하기 때문에 바로 알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그것과 함께 당부했음에도 엉망으로 되어있는 몇 권의 책에 대해 해결을 요청하고 다른 업무에 집중했다. 진심으로 뭔가 잘못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돌이켜봐도 일이 그런 식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업체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도서 납품한 ○○업체인데요."

"네."

"그 책은 수정해서 다음 주에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책은 늦어도 괜찮은데, 알라딘 DVD는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게 더 급해서요."

"아 네 그거.. 근데 혹시 책으로 주문하신 거 아닌가요?"

"..아니요. DVD로 주문했고, 보내드린 목록 보시면 나와있을 거예요."


그때 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검수할 때 지나가듯 봤을 때부터 의아했지만, 500권이 넘는 목록 중 한두 개쯤 까먹은 건 당연하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넘어간 책이 있었던 것이다.


"잠시만요.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네. 저희도 확인해볼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신간 서가로 갔다. 찾아보니 내 기억은 정확했다. 목록에 넣은 적도 없고 넣을 생각은 더더욱 없던 '알라딘 무비 아트북'이 꽂혀있었다. 살펴보니 가격이 거의 3만 원에 달했다. 아무리 그래도 꽤 이름난 도서 납품 업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황당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책으로 주문한 거 아니냐는 확신에 찬 직원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런 적이 없었다. 뭔가 내가 모르는 사이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는 강력한 촉이 왔다. 수서 과정에서 오고 간 목록을 전부 확인했다.


역시나였다. 최초로 내가 요청한 목록 중 일부 품절된 책을 제외한다는 의미로 업체에서 보낸 목록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DVD로 작성했던 알라딘을 본인들 맘대로 책으로 둔갑시켰다. 참고로 말하자면 당시 학교에서 사용하는 목록 양식은 도서와 비도서가 확실하게 구별되어있어 착각하기가 더 힘든 구조였다.


다시 업체에 전화를 걸어 따졌다. 죄송하다고는 했지만 그런 말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행정실에 문의해봤지만 처음 잘못됐을 때 확인을 했어야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정말 억울했다. 수서 목록 규모가 얼만데, 그걸 주고받을 때마다 하나하나 확인하는 게 가능하다고? 제대로 준 목록을 엉망으로 수정한 업체의 잘못인 게 명백한데도 결국 피해 보는 건 나 하나였다.


사실상 구매 자체는 그 목록대로 진행이 되었고, 예산도 그대로 집행된 상황이었다. 문제는 내가 진행할 영화 상영 행사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이미 계획서도 제출했고, 포스터도 만들어 홍보했고, 사전 신청자까지 받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막했다.




결국 내가 한 번 더 고생하는 길을 택했고, 그 대가로 무사히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화에서 하려 한다. 온갖 일을 겪은 후였는데도, 손에 꼽을 만큼 황당한 에피소드였다. 정말 믿기지 않았고,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수 있다고 단언해버렸다. 어쩌면 제발 그러길 바라는 기대였는지도 모른다. 언제나처럼 그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져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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