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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호두 사랑해요?

호두야, 오래오래 친하게 지내자.

by 정벼리

아이는 매일 호두를 끌어안는다. 아주 격하게. 아이의 일과는 등하교 시간과 밤잠을 제외하고는 전부 호두에게 맞춰져 있다. 호두 털에 얼굴을 부비고, 같이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고, 괜히 호두의 꼬리나 귀를 건드려본다. 호두가 삐져서 홱 돌아누우면, 아이고, 우리 호두 화났쪄, 어르며 간식을 슬쩍 건네고는 한다. 그렇게 호두와의 찐득한 하루를 보내다가, 가끔 한 번씩 나에게 호두를 들이대며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묻는다.


"엄마, 호두 사랑해요?"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일정하다.


"글쎄, 사랑까진 모르겠는데, 귀엽긴 해."


매우 솔직한 심경의 표현이다. 아이는 곧잘 섭섭해하더라만. 아직 '사랑'이라는 단어를 호두에게 붙이기엔 좀 조심스럽다고 할까. 솔직히 말해 호두가 없던 평화로운 시절이 여전히 한 번씩 그립기도 하다. 호두는 글로 미처 다 옮기지 못했을 뿐, 얼마나 손이 가는지 모른다. 말썽은 또 어떻고. 눈에 보이지 않게 조용히 내 슬리퍼를 씹어 놓거나, 사료 투정을 하며 밤늦게 배가 고프다고 간식 상자 앞에서 낑낑거릴 때면,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내가 어쩌다 이렇게 힘들게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지 기가 찰 때도 많다.


나는 사십 평생 개를 무서워했다. 그런 내가, 이제는 매일 강아지 배변 패드를 갈고, 눈곱을 떼어주고, 밥그릇을 씻고, 사료 성분을 따져가며 구매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모든 노동과 수고가 과연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가? 차마 아이에게 내놓지 못한 진짜 본심은, 호두가 아니라 너를 향한 사랑으로 이 모든 수고를 감당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었을지.




지난 겨울의 끝자락, 호두를 처음 데려온 뒤로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그리고 호두는 이제 어엿한 성견이 되었다. 덩치도 꽤 커졌다.


얼마 전, 호두 물건을 모아둔 거실 한 편의 정리함을 깔끔히 비워냈다. 아기 강아지 때 헐렁하게 맞던, 이제는 너무 작아진 옷들을 버리고, 아기 강아지 전용 간식도 동네 다른 아기 강아지에게 나눠주었다. 호두와 함께한 시간이 이렇게 쌓였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호두의 견생 두 번째 겨울이 다가왔다. 나는 다시 한번 쇼핑에 나섰다. 아무리 호두가 옷 입는 것을 싫어해도, 날이 추워지니 산책 갈 때 뭐 하나 걸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장바구니에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세 벌의 옷이 담겼다. 핑크색 바탕에 하얀 꽃무늬가 수 놓인 김장조끼 한 벌, 어두운 밤에도 빛나는 노란 형광 플리스 조끼 한 벌, 그리고 세련된 남색 패딩 점퍼 한 벌을 구매했다.


주문한 옷이 도착한 날 저녁, 나는 호두를 잡고 끈질기게 씨름하며 촌스러운 할매 김장 조끼를 기어이 입혀냈다. 기겁을 하며 도망치는 호두를 집념으로 붙잡아 끝내 이겼다. 조끼를 입은 채 산책을 나가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호두는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찬바람에 장사 있나. 집 안에서는 이걸 입느니 차라리 얼어 죽겠다는 듯 난리를 치던 호두였지만, 막상 바깥바람 속에서는 따뜻한 조끼가 썩 싫지만은 않은 듯 했다. 전날까지보다 훨씬 편안하고 여유롭게 냄새를 맡고 다니더라. 걷는 속도도 빨라졌고, 꼬리도 여유롭게 살랑거렸다. 너도 따뜻하니 좋지? 그러니까 왜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 따땃하니 얼마나 좋냐. 나는 김장조끼를 입은 호두의 촌스러운 뒤태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따땃한 조끼를 입으면 산책길이 더욱 신나지


그 순간 깨달았다. 아무래도 호두를 사랑하고 있나 보다. 똥강아지가 따뜻하게 산책하며 노는 모습에 미소가 절로 나오다니,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활활 타오르는 애정으로 시작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천천히 가까워지고 천천히 친해지며 스며드는 애정도 분명 사랑의 한 형태일 게다.


처음엔 호두가 맨살에 닿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았던 나였는데. 이제는 온 몸으로 대치하며 끌어안고 조끼를 입히는구나.


하루하루 시간이 쌓이면서 호두는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다음에 아이가 다시 물어보면, 이번엔 이전과 다른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호두에게도 이야기하고 싶다.


호두야,
앞으로도 우리 오래오래 친하게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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