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렸으나 어둡지는 않은 밤, 그를 만났다.
만남은
현실이 대개 그렇듯
별다른 맥락 없이 정해졌다.
그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마트의 라면 코너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는
'아주 매운맛 진라면' 봉지를 내게 양보했다.
나는 보라색을 좋아한다.
가끔
그의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어둠이 내렸으나 어둡지는 않은 밤.
사물의 윤곽은 아직 남아 있었고,
공기만 조금 먼저 저녁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는 그가 택시에서 내릴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흔한 빛 번짐으로
불빛은 선명한 채도를 드러낸다.
지하철 출구 쪽은 보지 않았다.
메시지가 왔다. 그가 보낸 것이다.
"저 이제 올라가요."
연락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첫 만남이었지만, 완전히 낯선 사이는 아니었다.
그가 보다 매끄럽고 준비된 방식으로 등장하리라,
아무 근거 없이 그렇게 짐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의외의 방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지하철 출구의 오른쪽 아래,
환하게 밝은 형광등 조명에서도 보이지 않던 그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바깥 어둠의 경계를 향해
대각선으로.
나는 그 모습을 한 박자 늦게 알아보았다.
완전히 도착한 사람의 등장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막 올라오는 중인 사람의 등장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첫인상은
나중의 많은 것들을 이미 닮아 있었다.
다 오기 전에 먼저 다가오는 사람.
완전히 자기 자리를 잡기 전에 먼저 접촉을 건네는 사람.
그는 계단을 끝까지 오르기도 전에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먼저 보았다.
얼굴보다 먼저 손이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인사라기보다,
일단 접속부터 만들겠다는 사람의 방식 같았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짧고 단정한 순간이었다.
그의 손은
서류 뭉치처럼 습기 없이
서늘했다.
무해하지만
감정은 담기지 않은 촉감이다.
그의 손은 상상했던 것보다 납작했다.
전체의 용적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가로와 세로의 부피감이 어딘가 달랐다.
그 미세한 어긋남이 이상한 기분을 들게 했다.
그 짧음 속에
그의 리듬이 이미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하철 출구,
오른쪽 아래에서 올라오는 몸,
다 올라오기도 전에 먼저 내밀어진 손.
나는 그를 서사로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의 일부를 잃은 것은 아니다.
분절된 기억의 파편이야말로,
그가 나에게 자신을 건네던 방식이었다.
그래서 내게 남아 있는 첫 만남은
한 사람의 성격이나 대화의 내용보다
그가 등장하던 방향과 속도,
먼저 화면 안으로 들어오던 손,
그리고 어둠이 내렸으나 아직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던
그 밤의 공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