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더 찝찝했다.
*이 글은 '동막해수욕장 가는길, 그날의 칼국수'라는 글에 대한 변주곡이다.
세탁기를 돌렸다.
수건이 삐죽삐죽해졌지만, 나도 딱히 말끔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냥 뭔가 하나쯤은 씻어내고 싶었던 거다. 뭐든. 수건이든, 기억이든.
오후엔 드라이브를 나갔다.
가슴속이 갑갑하면 바다가 답이라고, 드라마는 늘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나도 속는 셈 치고 동막해수욕장으로 간 거다.
그런데 도착한 바다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더 시끄러웠다.
칼국수집 간판이 기울어 있었고,
내 마음도 대충 그 정도 기울어 있었다.
어릴 때 아버지랑 왔던 곳인데,
지금 와 보니, 아버지도 나도 다 음소거 상태였다.
기억은 있는데, 소리는 없다.
그게 참 더 아프다.
늘 앉던 창가 맨 끝.
그 자리에 또 앉았다.
성격이 지독히도 일관되다.
바다를 본다기보다, 그냥
“또 여기에 앉아 있구나”
그 사실 하나에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칼국수 하나요.”
메뉴판은 안 봐도 된다.
직원도 날 안 본다.
좋다. 안 물어보고, 안 물어봐주는 관계가 지금은 딱 좋다.
그리고
그때
그가
들어왔다.
문이 덜컥. 공기가 툭.
아, 이런 순간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더 실감났다.
정확히 말하면, 이건 뭔가다.
감정도 아니고, 기억도 아니고,
그냥… 기척?
나는 고개를 안 돌렸다.
아직 얼굴을 보면 안 되는 타이밍이었다.
근데도 알겠더라.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다는 걸.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깊고, 쓸데없이 좋은 목소리.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 난다.
왜냐면 감정이 내용을 막고 들어와 버렸거든.
그리고 직선으로 걸어왔다.
내 쪽으로.
휘지도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진짜 이상한 놈이다. 누가 그렇게 정확하게 걷냐.
나는 바다를 본 척하면서
그의 신발을 봤다.
갈색 보트슈즈.
근데, 이상하게 낡았다.
부주의한 게 아니라, 뭐랄까.
그 낡음엔 사연이 있었달까.
…진짜 이러니까 내가 망상하지.
그가 말을 걸었다.
그때야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를 보기 전부터 나는 이미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순간, 확신했다.
“이 사람, 나를 안다.”
문제는…
나는 그를 모른다는 거다.
이럴 때 사람들은 말한다.
“전생에서 만났나 봐요.”
그런데 난 그런 말 안 믿는다.
전생이든 현생이든
그가 나한테 한마디 사과도 없이 사라질 사람이라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린 서로 이름을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름을 묻는 순간,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작되면 끝도 있다.
지금은 그냥,
식어가는 칼국수를 앞에 두고
그냥 그렇게 앉아있는 걸로 충분했다.
사랑?
그런 단어 붙이지 마라.
이건 그냥
‘기억이 닿지도 않았는데
지워지지 않는 사람’
그런 종류의 감정이다.
결론? 없다.
오후 3시 16분, 칼국수는 식었고
그 남자는
내 마음 어딘가에 뜨거운 김 하나 남기고
사라졌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고,
나는 아직도 국물 위에 떠 있는 그 기척이
왜 이렇게 짜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가 나를 안다. 나는 그를 모른다.
만난 시점은 미래이다.
전생이든 현생이든 사과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