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한 암스테르담 집을 마주하고 감자튀김 한 잔
암스테르담은 마음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단, '마음먹는 게' 그게 참 쉽지 않다. 일은 바쁘고, 나가도 이곳을 방문한 출장 손님들을 모시고 가이드차 가는 것이 전부다. 그러니 갔던 코스를 매일 답습한다. '마음먹고' 가는 암스테르담은 그와 다르게 내가 즐기기 위한, 혼자만의 여행을 하고 싶은 곳의 의미다. 아마, 혼자 암스테르담을 나갔던 게 1년이 넘은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마음속으로는 다시 한번 더 혼자 나가서 여유롭게 둘러봐야지 했는데, 그게 벌써 1년이 넘은 것이다. 마침, 네덜란드에 대한 책을 준비 중이니 아직 모자란 자료와 사진을 수집하기 위해 길을 나서기로 했다. '마음먹어야 하는' 구실이 생긴 것이다.
일요일 아침 9시. 암스테르담.
매일 차를 끌고 가는 곳이니, 이번엔 혼자만의 여행을 위해 메트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가방엔 보조 배터리와 틈 날 때 잠시 글을 쓸 수 있도록 노트북을 챙긴다. 선글라스를 끼고 이어폰을 꼽아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9시 도착을 위해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을 택했다. 매일을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암스테르담. 항상 손님들과 함께 였던 나. 이번엔 둘 만의 조우를 위해 택한 시간이었다. 그래, 일요일 이른 아침의 암스테르담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이번엔, 항상 가던 코스를 뒤로 하고 가보지 못한 곳, 해보지 않은 것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항상 가던 코스는 참고 글로 대체한다.
(참고 글: 암스테르담으로 마실 가실래요?)
역시나. 집 앞 메트로에 오르니 아무도 없다. 다른 칸에 몇몇 사람들이 그제야 올라타 전차의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4월 말의 바람은 아직 찼고 아이들은 아직 꿈나라에 있었으며, 전차 안은 히터로 따뜻했고 와이프는 아이들의 아침을 만들어주는 시간. 그 시간, 전차는 서서히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향해 미동했다. 덜컹덜컹하는 것은 움직임이자 소리였다. 조금은 요동하던 내 마음도, 심장도 그와 같았다.
51번 트램.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종착역으로 한다. 일요일 이른 아침. 내가 있던 칸엔 아무도 없다.
암스테르담의 태동을 따라 걷는 길.
보통 걷는 코스는 중앙역부터 올드타운, 운하 길, 홍등가와 담광장을 돌고 오는 코스다. 수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며 난 미로와 같이 오밀조밀한 암스테르담의 시내에 너무나도 익숙해 있었다. 익숙해지니 가던 길 외에는 잘 가지 않았다. 사람이 그렇다. 괜히 모르는 길 갔다가 고생하거나, 별 거 없을 것 같아 결국 익숙한 것에 손을 내밀고 발을 디딘다. 그래서 오늘은 암스테르담의 태동을 따라 걷기를 택했다. Begijnhof (베긴 호프)로 가는 길. 베긴 호프는 암스테르담의 가장 오래된 '뜰'로 그곳에선 '암스테르담의 기적'이라는 한 사건이 발생하고, 그렇게 암스테르담은 태동하게 된 것이다.
13세기 그 어느 즈음. 두 수역이 만나는 지점. 북해와 여실히 이어지고 있던 습지대에 살던 사람들이 바닷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댐을 건설했다. 그 댐은 한‘강(江)’의 물줄기를 틀어막은 것이었다. 그 ‘강’의 이름은 ‘암스텔(AmstelRiver)이었고, 암스텔 강을 댐으로 막은 그 지역의 이름은 ‘Amstelredamme(암스텔레담머)’, 즉 암스테르담이 되었다. 댐으로 막은 습지. 어디 상상이나 가는가? 얼마 되지 않는 땅에서 곡식을 재배하는 농부와 늪지에서 이런저런 생선들을 잡아들여 사는 사람들. 언제 물이 범람할지 몰라 매일이 불안한 그곳. 그리 정성을 들이지 않은 잠만 잘 수 있을 정도의 구조물들이 ‘집’이란 이름으로 세워져 있었다.
암스테르담이 이렇게 초라할 때, 위트레흐트와 마스트리흐트 같은 타 도시들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지금도 그 역할이 작지 않지만, 어쩐지 그 어깨의 높이보다 더 커버린 암스테르담의 위상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보잘것없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든 계기는 전설과 같이 내려온다. 14세기 중반. 어느 한 노인이 집에서 생과 이별하는 순간. 우연찮게 구역질과 함께 쏟아져 나온 토사물 속에서 ‘성채’가 튀어나왔다. 이 ‘성채’는 그 노인을 돌보던 여인들에 의해 불 속에 던져졌으나 그대로 살아남았고, 이것은 가톨릭교에 의해 ‘기적’으로 공표되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난 뒤, 어느새 암스테르담은 성지순례지가 되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1489년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이 이곳을 순례하다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는 하나 둘의 사람들을 수 천, 수만 명으로 늘려 놓았다. 지금은 ‘Munttoren(문트탑)’ 근처 뒤편에 쇼핑 스트리트로 변모한 이곳이지만, 당시의 그 신성함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연초가 되면 독실한 가톨릭교도들은 이 거리에서 행진을 벌인다.
- by 스테르담 -
중앙역을 빠져나와 중앙역을 한 번 마주 본다. 중앙역을 등지고 바라보면 시선이 오른쪽 사진과 같다. 이렇게 곧바로 약 1km를 좀 못 가면 담광장이 나온다. 중앙역부터 담광장에 이르는 이 길을 Damrak (담락) 거리라고 한다.
이 담락 거리는 암스테르담의 원초적 태동에 이어, 이곳을 경제적으로 다시 한번 더 태동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가 걷는 이 담락 거리는 물이 있던 자리였고 양쪽으로는 배를 만드는 조선소, 그리고 비누와 같은 갖가지 비누 등의 공산품을 만들던 공장들이 가득했었다. 동서양의 문화와 경제를 교미시킨 동인도회사의 배도 여기서 출발했다. 잠시, 준비 중인 책에 있는 내용을 소개한다.
우리가 4D 극장에 들어섰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암스테르담 중심에 서있다. 여기저기 분주한 사람들. 곳곳에 정박해 있는 배. 아직 땅보다는 물로 더욱더 흥건한 암스테르담의 중심은 그렇게 역동적이다. 청어를 손질하고 남은 내장들이 썩어가는 냄새. 여기저기 세워진 비누 공장의 비누냄새. (당시 발트해로부터 수입해 온 유채 씨앗은 암스테르담 여러 곳의 공장에서 비누로 생산되었다.) 여기에 선박을 만들기 위해 배의 표면에 바르는 타르의 역한 냄새까지. 삐뚤빼뚤한 집 사이 골목에서는 술 취한 뱃사람들의 고성방가가 가득했다. 날씨는 우중충했지만 그것이 암스테르담의 발전을 방해할 요소는 아니었다.
- 중략 -
네덜란드 왕궁이 자리 잡은 담광장에서 중앙역까지 이어지는 약 1km의 구간은 아마 한국 사람에게는 가장 유명한 곳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네덜란드는 하루 코스로 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둘러보는 곳이 담광장 근처 담락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덜란드 관광을 검색해보면 수많은 블로그에 담락 거리에서 먹은 감자튀김과 홍등가 내용이 만연하다. 담광장과 중앙역을 잇는 이 길 이름의 뜻은 Dam (댐) + Rak(Reach)으로, 댐 근처를 수직으로 가로지르던 곳을 일컫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즉, 지금은 많은 상점과 기념품 가게 그리고 맛집들이 즐비하지만 이곳은 원래 물길이었던 것이다.
- by 스테르담 -
오늘은 보통 가던, 그러니까 중앙역을 등지고 왼쪽 말고 오른쪽 지역을 돌아볼 요량이었지만 일요일 아침의 홍등가는 어떤지 궁금해서 익숙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예상대로, 토요일 밤의 열기가 어떠했는지 길거리에 놓인 쓰레기와 여기저기 누워 있는 자전거가 그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물론, 사람은 없었다.
이제는 익숙한 길을 떠나 담광장 왼쪽 편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드디어 베긴 호프를 맞이한다. 글로만 보다가 마침내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안에 있는 뜰은 암스테르담의 태동과 함께 한 곳이고, 재밌는 것은 가뜩이나 낮은 암스테르담의 지면보다 좀 더 낮게 깔려 있다는 것이다. 아마, 몇 번 지나친 것도 같은데 유심히 보지 않으니 그곳에 뜰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을 못했다.
베긴 호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길을 나선다. 배가 고파 무얼 먹을까 생각했다. 쌀쌀한 날씨, 좀 걷느라 허기진 배는 일단 탄수화물이나 고기, 또는 그 둘을 모두 넣어 달라고 난리였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맥도널드 햄버거였지만, 잠시 진정하고 혼자 시간을 보내며 의미 있는 것을 먹어보자고, 그렇게 속을 달래고 달랬다.
암스테르담은 여기저기 기울어진 집이 보인다. 그 이유는 오른쪽의 도르래와 관련이 있다. 복습 차원에서 참고 글을... (참고 글: 암스테르담 집들은 왜 기울어져 있을까?)
방향을 잡아 암스테르담 뮤지엄과 'Homomonument'로 향한다. 암스테르담 뮤지엄은 베긴 호프 바로 옆에 있고, 'Homomonument'는 트램을 타고 두 정거장 정도를 가야 한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 바로 근처에 위치해 있다.
'Homomonument'는 동성애자들을 위한 세계 최초의 기념물이다. 핍박 받았던, 지금도 핍박받고 있는 동성애자들을 기리기 위한 것. 네덜란드가 세계 최초로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했으니 이러한 기념물이 있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니다. 땅에 박힌 삼각형 모양의 기념물로, 평지에서는 그 모양이 잘 보이지 않고 높은 곳에 올라야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참고 글: 네덜란드 동성애 이야기)
암스테르담 뮤지엄
삼각형의 세 꼭짓점
허기진 배가 발길을 재촉했다. 그제야 떠오른 건, 역시나 감자튀김이었다. 혼자 먹기에도 좋고, 당장 배를 불리기에도 좋았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뜨거우면서 솜털 같은 탄수화물의 조합은, 육체와 영혼을 달래고 어루만진다. 많이 걷다, 허기가 져서 먹는 네덜란드의 감자튀김 맛을 아는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것이다. 담락 거리에 있는, 언제나 사람이 북적이는 감자튀김 가게에서 감자를 받아 들으니 벌써부터 온 몸이 무언가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네덜란드 감자가 특별한 이유는, 참고 글: 감자튀김은 사랑입니다.)
암스테르담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내가 꼭 추천하는 장소가 하나 있다. 큰 규모로는 내세울 것이 없는 암스테르담에서, 프랑스의 에펠탑이나 영국의 빅벤,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성당과 같은 곳은 없다. 다만, 이곳이 암스테르담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추천하는 삐뚤빼뚤한 집을 마주 보는 곳이다. 소박하지만 그 느낌은 강렬하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어떻게 찍어도 작품이 되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마치 뒷 배경은 합성한 것과 같이 예쁘고 멋있게 나온다. 어느 관광 책자에도 나오지 않는 곳. 그래서 나는 항상 손님들을 이곳에 세워 놓고 사진을 찍어 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가장 암스테르담스러운 곳이라서.
햇살은 따뜻했고 귀에는 감미로운 음악이 흘렀으며 손에는 듬직한 감자튀김이, 그리고 암스테르담의 생동감이 나를 그곳에 걸터 앉게 했다. 삐뚤빼뚤한 암스테르담의 개성 넘치는 집과 마주하고는 감자튀김으로 건배를 청했다. 지나가는 배에서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준다. 모양새가 웃겼지만, 이 순간을 마음에 그리고 사진에 담고 싶었다. 감자튀김 고깔을 들고 그 풍경을 잡아 내려는 바둥거림을 사람들은 유쾌하게 바라보며 지나갔다. 그렇게, 이상해도 괜찮다. 여기는 자유의 상징, 암스테르담이니까. 그래서 난 암스테르담이 좋다.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암스테르담에게 바치는 어설픈 시 하나를 끝으로 '낮의 암스테르담에서 혼자' 글을 마무리한다.
암스테르담 詩
그대 길을 걷다
자유를 느꼈는가.
그대 길을 걸어
유유함을 얻었는가.
드러내려 안달하는 곳의
목소리를 들은 적 있는가.
그러나 이곳은 그러하지 않아도
결국 드러나는 곳임을 깨닫는가.
아름다운 일상을
너무나 천연덕스레 품고 있어
일상이 일상 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저 들판 한가운데
자전거와 하나 된 실루엣이
얼마나 행복인지도 모르는 아이들.
그대가 길을 걷다
자유를 느끼고
그대가 길을 걸어
유유함을 얻었다면
그곳은
여기는
암스테르담이라고 해두자.
그대가 있는
어디든
일상의 행복이
도사리고 있거든
그곳을
여기를
암스테르담이라고 해보자.
- by 스테르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