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재윤 Dec 11. 2021

사랑의 원자탄

사랑이면 진심을 알 수 있을까


  수학에는 조건문이란 문장이 있다. 조건문은 ‘만약 p이면 q이다.’라는 문장을 말한다. 조건문에는 p라는 가정과 q라는 결론이 들어있다. 수식으로는 조건부 논리 연산자 →를 붙여서 'p→q’로 나타낸다.

  조건문의 논리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조건문은 주어진 조건에 따라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다음 조건문을 살펴보자.


수요일에 비가 내리면 우산을 써야지.


  주어진 조건문의 p라는 가정은 ‘수요일에 비가 내리면’이고 q라는 결론은 ‘우산을 써야지’이다. 위 조건문을 참이라 가정하자. 그런데 수요일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우산을 안 써도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오로지 조건문에 근거하여 판단하면 우산을 써도 좋고 쓰지 않아도 좋다. 조건문에서는 수요일에 비가 내릴 때 행동지침만을 말했다. 수요일에 비가 내리지 않을 때의 지침은 어디에도 없다. 


  조건문에서 주어진 가정이 거짓이면 가정에 대한 결론은 무엇이 나와도 옳다. 수요일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축구공을 차도 좋다. 커피를 마셔도 괜찮다. 뭘 해도 좋다는 말이다. 주어진 조건문이 거짓인 경우는 수요일에 비가 내렸는데 우산을 쓰지 않는 경우밖에 없다. 즉 가정이 참이고 결론이 거짓인 경우에만 거짓이다. 따라서 “수요일에 비가 내리면 우산을 써야지.”라는 조건문이 참이라면 다음 표처럼 정리할 수 있다.

  조건문의 논리가 무엇인지 알았으니 다음 주어진 조건문을 살펴보자. 사랑이면 진심을 알 수 있다. 이 조건문을 참이라 가정해보자.

  조건문이 거짓인 경우는 오직 한 가지다. “사랑이면 진심을 알 수 없다.” 이 외에 사랑이 아니면 어떤 결론이 나와도 좋다. 조건문의 논리대로 사랑이 아니면 엉엉 울어도 되고 이별해도 괜찮다.


사랑이면 진심을 알 수 있다. 이 조건문의 반례는 존재할까.



  진물과 피가 뒤섞인 방안, 표현하기조차 버거운 냄새는 코를 찌르는 거로 모자라 머리까지 뒤흔든다. 이곳은 *나병 환자들을 수용한 14호실. 환자들의 병세가 얼마나 심했는지 전문 의료인조차 들어갈 수 없어 나병 환자들이 그들을 간호한다. 그런데 이 방 안에 들어가려는 한 사람이 있다. 나병 환자들은 화들짝 놀라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이고 목사님 이곳만큼은 절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저희조차 버겁고 꺼리는 곳입니다. 목사님 정말로 전염될 수 있다니까요.” 그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대답했다. “차라리 전염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들 곁에서 계속 간호하고 기도해 줄 수 있잖아요.”

*나병 :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전염성 질환.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병이다.     

  

  그는 병동의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병 환자들은 급히 손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틀어막았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다. 그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나병 환자에게 다가갔다. 그 환자의 몸 주위는 고름과 피로 정신없이 뒤엉겨 있다. 그는 환자의 붕대를 풀고 문드러진 살에 고인 피와 고름을 입으로 직접 빨고 뱉었다. 두 눈으로 보기 힘든 광경이다. “세상에 목사님….” 붕대를 감고 있던 환자가 들썩거린다. 병동 안은 어느새 울음바다가 되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을 몸소 실천한 사람. 목사 손양원이다.


  해방 후, 나라는 나사 빠진 의자처럼 불안정했다. 전국 곳곳에서 남한만의 선거로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우익세력과 통일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좌익세력이 충돌했다.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1948년 10월엔 순천에서 여순사건이 터졌다. 좌익 무리는 경찰서를 점거했고 기독교인은 미국의 스파이라며 무참히 살해당했다.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도 무사할 수 없었다. 좌익 학생 한 명이 동인과 동신을 향해 소리쳤다. “친미 사상에 빠진 미친 예수쟁이 놈들은 총살감이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타당-탕.” 두 형제는 또래의 손에 죽었다. 동인의 나이 23세, 동신의 나이는 18세였다.


  동인, 동신의 시신은 나흘이 지나서야 손양원 목사가 있는 애양원에 닿았다. 그의 아내 정 여사는 수레에 실려 온 아들들의 시체를 보자마자 기절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나란히 노래를 부르던 아들들이었는데. 정 여사는 동인과 동신의 손을 부여잡았다. 눈이 뒤집힌 채로 오열했다. 그는 수레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순천 자취집에서 동인이와 동신이가 쓰던 물건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책과 가방, 교복과 소지품 등 이제는 유품이 된 물건 하나하나에는 동인 형제의 땀 냄새와 손때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손 목사가 교복을 펼쳐 어루만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흐흐흑……으흐흑!” 울음을 터트렸다. 교복을 꼭 끌어안은 채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동인아, 동신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보고픈 내 아들아.”


  손양원 목사는 동인과 동신의 장례식 날 아홉 가지 감사 기도를 드렸다. 사람들은 일곱 번째 기도 제목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일곱째, 저는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안재선을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합니다. 그런 사랑의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추측하건대 사람들은 손 목사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테다. 어찌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가. 그를 손가락질하며 ‘위선자, 가식 덩어리, 아들을 팔아서 명예를 얻으려는 놈, 죽은 아들을 보기에 부끄러운 아버지.’라고 말했을 거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분명 잘못되었다. 손 목사도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아픔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라는데 어찌 쉬이 감당할 수 있을까. 안재선을 만나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우리 죄를 용서했듯이 나도 재선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을 주세요. 도와주세요.”


 “네가 재선이냐?” 손 목사는 맞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재선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다가 가만히 손을 잡았다.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 이젠 다 괜찮다. 하나님께서 네 실수를 다 용서하셨을 거야.” 재선은 잔뜩 겁에 질려 손 목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곧 바닥에 엎드렸다. 이내 재선의 어깨는 흐느낌으로 떨려왔다. 손 목사의 진심 어린 눈빛 앞에서 비로소 두려움이 아닌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손 목사는 재선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작고 여린 어깨였다. 이제 갓 스무 살, 소년의 체취를 채 벗지 못한 어깨에 총을 메고 방아쇠를 당겼을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미친 세상 탓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을 광기 어린 이념의 희생자로 내몬 잘못된 시대 탓이다. 그 세상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아이를 품어주리라.




  “사랑이면 진심을 알 수 있다.” 이 조건문의 반례를 찾을 때 실패했던 이유는 목사 손양원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렸다. 참 역설적인 단어다. 원자탄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다. 원자폭탄이 터지면 반경 500m 내의 존재하는 모든 것이 증발한다. 폭발 후 생기는 후폭풍은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가볍게 날릴 정도다. 원자탄, 이 무시무시한 단어에 사랑이란 말이 들러붙었다. 이토록 모순투성이인 단어가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 아니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