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만 일기장
오랜만에 일기를 쓰려고 하니 어색하다. 왜 갑자기 일기가 생각난 걸까. 말할 사람은 없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들을 어딘가 풀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자정이 가까운 시간 틀어 놓은 라디오 노랫소리가 감상에 젖게 만들었던 걸까. 혼자인 시간에 익숙해졌다는 의미인지도. 암튼 뭔가 끄적이고 싶은 마음에 일기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쓴 일기가 무려 작년 6월, 반년도 훨씬 지났다. 일기는 늘 쓰고 싶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일기장을 펼치기까지 너무 어렵다.
이 집을 처음 보고, 계약했던 날이 생각난다.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본가와 가까운 곳으로 임장을 다녀봤지만 억 단위의 돈을 빌릴 배짱은 없었다. 어느 날 엄마가 이모네 집과 가까운 곳에 매매가능한 빌라가 나왔다며 한 번 가보자고 했다. 나의 선택지에는 없었던 동네여서 그냥 구경만 해보자 하고 간 길에 엄마와 이모한테 떠밀려서 가계약금을 입금했다. 그렇게 집을 샀다. 정확히 말하면 내 이름으로 된 집이 생겼다. 세를 가득 안고 산 내 집. 충분히 마음에 들긴 했지만 확신도 없이, 시세도 알아보지 않고 이렇게 빨리 결정해도 되는 건지 집을 사는 게 처음인 나로선 알 수 없었다. 계약 시에 집값을 전부 치르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계약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집이 생겼다. 대단지 아파트는 아니지만 혼자 살기 충분한 빌라. 전세계약기간이 만료되는 3년 후에는 들어가 살 수 있는, 내 돈 내산 집이 생겼다.
왜 그렇게 혼자 살고 싶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내 공간을 갖고 싶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물론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에도 내 방은 있었지만 내 공간은 아니었다. 방 책상에 앉아있으면 바깥에서 들려오는 티브이소리, 온갖 말소리와 소음이 내 방에 흘러들었다. 그 방에서 나는 혼자 인 것 같지 않았다. 방문을 닫는 것조차 엄마 아빠한테 철벽을 치고 있는 느낌이 들어 늘 한 뼘 정도 문을 열어 두곤 했다. 그런 신경들에 피곤해지면 그냥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내 공간 따위는 이미 없었다는 듯.
다른 이유는 내 취향으로 꾸며진 공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내 방안에 있는 어떤 것도 내 취향이 반영된 물건은 없었다. 당연하다. 부모님 집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고른 물건들, 엄마가 보기에 쓰기에 적당한, 엄마의 취향이 반영된 물건들이다. 10년 넘게 모아 온 내 취향은 책상 아래, 서랍장, 베란다 책꽂이에 빼곡히 채워 숨겨두었다. 돈을 벌고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 때부터 사 모았던 물건들이 제 자리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점점 간절해지면서 생각했다. 독립을 해야 할 때라고.
그렇게 독립을 했고, 꿈같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혼자 있는 이 공간에 익숙해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마냥 좋은 지금, 나 스스로에게 충분히 집중할 수 있는 내 공간에서 첫 일기를 쓴다. 전혀 오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왔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이 순간, 이 기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