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이다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조금만 더 참을 걸 그랬나. 내 태도에 문제가 있었을까. 겨우 잡은 일자리였고, 보수도 꽤 좋을 편이라 변수가 없다면 올해까지는 큰 고민 없이 지낼 수 있었는데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이런 기회를 놓친 나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다.
이사를 오고 두 달이 다 되어가는 5월 초, 내 통장 잔고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첫 취업을 한 이래로 이런 잔고는 통장에 찍힌 적이 없는데. 일은 하기 싫지만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프리랜서를 구하는 여러 곳에 이력서를 냈다. 퇴사를 할 때만 해도 돈이야 프리랜서라도 해서 벌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모두 경기가 좋을 때의 말이라는 걸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지금은 취업을 하기도 적절한 시기는 아니다. 그래도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일을 구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단기계약직을 구하는 공고도 골라서 이력서를 보냈지만, 이제는 일단 연락이 되고 보자는 심정으로 모든 곳에 이력서를 보낸다. 그것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서 내가 가진 비루한 인맥 중에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리고 드디어 연락이 닿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구나 라는 마음이 들어 뿌듯했다.
일은 고용한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아닌 고용한 회사를 대신하는 일하는 파견직이었다. 새로운 일과 사람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프리랜서가 주는 적당한 책임감도 좋았다. 집에서 쉴 때는 돈만 있으면 이렇게 평생 놀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적당한 일과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3주 정도 일했을까. 하루 이틀 극심한 기침에 찾은 병원에서 감염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유행 끝물에 병에 대한 파급력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 이제야 걸리다니. 고작 몇 주 일하고 쉬기는 눈치 보이지만, 나라에서 정한 격리기간이 있으니 눈치 보지 말자고 되새기며 집에서 사경을 헤맨 지 삼 일째 되는 날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파견 나가 있던 회사와의 계약이 철회되었다고, 격리 해제 후 파견지의 장비를 회사에 반납하는 것으로 나와의 계약을 종료하겠다는 연락이었다. 이제 무슨 청천벽력일까. 나의 문제만은 아니었지만 인원충원을 계속 요청했던지라 일주일간 나의 부재가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 짐작해본다. 그래도 내가 일하는 와중에 이렇게 돼버리다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3주 근무, 일주일 격리를 포함하여 정확히 한 달치 급여를 챙겨 받았지만, 속이 쓰리다 못해 아팠다.
이렇게 다시 백수가 되었다. 일을 하지 않을 땐 철저하게 백수가 될 수밖에 없는 프리랜서. 프리랜서의 프리가 ‘자유’라는 뜻도 있지만 duty-free처럼 ‘없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생은 역시 생각한 대로 흐르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어떻게든 될 거라는 희망이 보였다가 눈앞에 사라졌다. 어떠한 가림막도 방패막이도 없이 야생에 내던져진 기분. 진짜 야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