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 +1 년 5월 6일

답은 내 안에 있어

by 나리

며칠 전부터 겨울 내 쳐있던 커튼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추운 겨울을 바람을 막아주던 암막 커튼이었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3월 중순에 이사 와서 달아 놓았던 커튼은 당연히 엄마 집에서 가져온 것이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이사 오면서 지출이 많아 커튼까지 사는 것은 꿈도 못 꿨다. 여분이 있어 가져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일 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내 사정은 프리랜서에서 프리랜서로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독립을 시작했던 때보다는 잔고가 조금 생겼으니 커튼 하나 정도는 마음에 드는 걸로 달아도 되지 않을까. 어떤 게 우리 집에 어울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동대문 시장에 갔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밝은 형광등아래 겹겹이 걸려있는 화려한 커튼 매장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눈으로만 훑어보아도 다 보지 못한 정도로 많은 종류의 커튼들 사이에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화려한 패턴의 커튼, 고급스러운 자수와 레이스를 덧댄 커튼, 방금 전 가게에서도 본 것 같은 커튼 등등... 수많은 커튼들을 눈으로 빠르게 좇으며 건물 끝에서 끝까지 몇 번이나 다다랐지만 마음에 꼭 드는 커튼을 발견하지 못하던 때, 한 천 뭉텅이에 시선이 꽂혔다. 잘 다려서 밝은 조명 아래 곱게 걸린 커튼이 아니라 커튼으로 만들기 위해 바닥에 늘어놓은 커튼 원단이었다. 지금까지 지나쳐온 수많은 가게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패턴과 색상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음속으로 이거다라고 정하고, 사장님께 커튼에 대해 물으니 면 원단이라 물빨래가 가능한 합성 섬유보다 세탁이 까다롭긴 하지만 걸어놓으면 한층 고급스럽다고 말씀해 주셨다. 결정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마음에 드는 다른 커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빨래가 아닌 드라이를 해야 한다는 것만 빼면 가격도 저렴해서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맞춘 것처럼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우리 집에 딱 어울리는 커튼을 찾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주문하고 며칠 뒤 커튼이 도착했다. 천장에 레일을 설치하고 핀을 달아 커튼을 걸었다. 커튼은 생각보다 훨씬 집과 잘 어울렸다. 빛은 들어오지만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 적당히 얇아서 바람이 불면 풍선처럼 크게 부풀어 오르는 커튼을 계속 바라보게 됐다. 신기하고 조금 놀랐다. 커튼을 사러 나설 때만 해도 내가 원하는 커튼이 어떤 디자인의 어떤 색깔인지도 모른 채 찾아 나섰는데, 단번에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거라고 확신했다는 사실 말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을까. 영화 컨택트처럼 모든 일들은 이미 벌어진 상태이고 시간의 순서대로 하나씩 경험해 나가는 거라면?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의 내 삶을 담담하게 받아 드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게 옳은 일인지 고민할 필요 없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서 두려워하지 않고, 내 마음이 흐르는 대로 그것을 정답으로 믿고 앞으로의 날들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미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모으는 삶으로 정해져 있을 테니 말이다.


독립해서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제껏 가져보지 못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더 커진 공간만큼 자유로워졌지만, 작은 방을 나서면 잊곤 했던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제는 집구석구석에서 느낀다. 그만큼 가꾸어야 할 내 삶의 스펙트럼이 더 넓어졌다. 경계 없이 열려있던 생활이 내 발로 나서지 않으면 누구와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 가둘 수 있는 나만의 성이 생겼다. 앞으로의 날들에 비해 아주 찰나일 이 시간 동안 독립생활의 여러 면을 경험했다. 이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날들은 지금꺼 내가 겪었던 시간들과는 또 다른 단계의 생활이 될 것 같다. 더 성숙하지만, 여전히 나일 수밖에 없는, 나만의 생활을 이어갈 것이다. 갑자기 생각나서 쓰게 된 일기장이 이제 몇 장 남지 않았다. 조금은 달라질 나의 삶을 새 일기장에 남겨두고 싶다. 내일은 새로운 일기장을 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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