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은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다
그렇다면 이 자존감은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자존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자신의 어둠을 긍정하는 역량)’이다. 또 하나의 정의는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다. 이 두 정의는 자존감이라는 하나의 실체를 설명하는 다른 표현이다. 달리 말해, ‘자존감=자신의 어둠을 긍정하는 역량=사랑받은 기억의 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낯선 도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존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둠(단점‧한계‧추함)’이다. 그것을 긍정할 역량이 없어서 자존감이 빈약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어둠’을 긍정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자신의 ‘어둠’을 긍정할 수 있는 역량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바로 사랑이다. 더 정확히 말해,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다.
우리는 왜 ‘어둠(단점‧한계‧추함)’을 긍정하지 못할까? 두려움 때문이다. 자신의 ‘어둠’이 드러났을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어둠’을 긍정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그 ‘어둠’이 없는 것처럼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자신감은 그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해 찾게 되는 허구적 자기긍정 상태다. 그러니 자신감은 이렇게도 정의할 수 있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이들의 허구적 자기긍정 상태.
반면 자신의 ‘어둠’에 대해서 긍정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어둠’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의 ‘어둠’을 드러내도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 확신이 있기에 자신의 ‘어둠’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사랑받은 기억의 합’으로부터 온다. 사랑받은 기억이 많으면, 자신이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무의식적 확신이 생긴다.
‘성원’은 많은 ‘어둠’(뚱뚱함‧가난‧전문대)이 있지만, 그것을 긍정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부모‧친구‧연인에게 사랑받은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성원’이 자신의 ‘어둠’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뚱뚱해도, 가난해도, 전문대를 나와도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분명히 있어!” ‘성원’에게는 이런 확신이 있다. ‘성원’뿐만 아니라 깊은 사랑을 받은 기억이 많은 이들은 누구나 이런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확신이 있다. 이런 확신은 자신의 ‘밝음’뿐만 아니라 ‘어둠’마저 긍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자존감)은 ‘사랑받은 기억의 합’에서 온다.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기!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가? 자존감을 튼튼하게 만들면 된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자존감은 드물고 귀한 역량이다. 자존감은 능동적 역량이 아니라 수동적 역량이기 때문이다. 즉, 자존감은 혼자 쌓을 수 있을 역량이 아니다. 혼자 책을 읽고 명상하고 여행을 한다고 자존감이 튼튼해지지는 않는다. 자존감은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기 때문이다. 즉, 자존감은 누군가에게 깊은 사랑을 받아야지만 생기는 역량이다. 자존감이 수동적 역량이라면, 그 역량을 함양하기 위해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존감은 수동적 역량이지만, 그 역량을 지니기 위해서는 능동적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받기 위해 먼저 사랑하기! 튼튼한 자존감을 원한다면, 능동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할 때, 사랑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 가능성이 현실화될 때, 즉 우리에게 사랑받은 기억이 조금씩 쌓일 때, 그만큼 우리의 자존감은 튼튼해진다. 그렇게 튼튼해진 자존감이 우리를 피해의식으로부터 구원해준다. 이는 공허한 이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온몸으로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내 여드름 난 피부와 뚱뚱한 외모가 싫었다. 그 ‘어둠’이 싫어서 피부과를 다니고 매일 운동을 했다. 하지만 그 ‘어둠’을 결코 긍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것은 나의 피해의식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 나름으로 그 친구를 사랑해주려 애를 썼다.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고, 그 친구는 나를 사랑해주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거울 앞에 서서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나의 여드름과 뱃살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나의 여드름과 뱃살을 사랑스럽게 만져주며 말했다. “여드름도 뱃살도 다 예뻐.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왠지 모를 울컥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깊은 사랑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나의 여드름과 뱃살이 예전처럼 미워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것들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외모에 관한 피해의식은 점점 옅어져갔다.
서글픈 삶의 진실이 있다. 피해의식에 자주 잠식당하는 이는 사랑받은 기억의 합이 작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절망적 진단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삶의 진실은 하나의 희망을 열어준다. 우리가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이 누군가에게 가닿아 우리도 사랑받을 수 있을 때, 우리의 피해의식 역시 점점 옅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이 있다.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