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의식은 ‘같이 죽는’ 방식의 자기방어다
나의 ‘갑질’ 이야기
정신없이 직장 생활을 할 때였다. 독일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현지인들과 긴 업무를 끝내고 저녁 식사를 하러 어느 식당엘 갔다. 온통 업무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테이블에 앉았다. 그때 식당 점원이 그릇을 던지듯이 내 앞에 놓는 것 아닌가? 함께 갔던 현지인들을 대하는 것과 나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돈이 없어 보여서 무시하나? 식사를 하는 동안 온갖 생각이 들어서 더욱 화가 났다. 식사를 마칠 무렵, 점원이 내게 왜 그런 무례한 행동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함께 갔던 현지인에게 물었다.
“아까 점원이 왜 제게만 무례하게 행동한 거죠?”
“식당에 들어가실 때 점원에게 인사를 안 해서 그랬을 거예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한국에 있을 때 내가 얼마나 많은 ‘갑질’을 하며 살았는지 순식간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갑질’이 무엇인가? 사회‧경제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자가 상대방에게 오만하고 무례하게 구는 행동이다. 나는 왜 독일에서 점원에게 화가 났을까? 그녀가 무례한 행동을 해서?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나의 ‘갑질’ 근성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돈을 쓰는 자(손님)가 ‘갑’이고, 그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자(점원)는 ‘을’이다. 그 ‘갑을’의 상하관계는 암묵적이지만 공고히 존재한다.
‘갑질’ 사회
하지만 정확히 말해, 점원과 손님은 상하관계가 아니다. 동등한 관계다. 그저 점원은 돈을 받고 서빙을 하고, 손님은 돈을 내고 음식을 사먹을 뿐이다. 점원이 웃으며 친절하게 손님을 대하면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점원의 선택일 뿐이다. 함께 갔던 현지인들은 모두 웃으며 점원의 인사에 응답해주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바쁜 업무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변명일 뿐이다. 내가 돈 내고 밥 먹는 곳에서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 나는 점원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러니 점원이 나에게 웃으며 친절을 베풀 이유는 없었다. 내가 그랬듯, 점원도 그저 자신이 할 일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돌아보면, 점원은 내게 특별히 무례하게 행동한 것도 아니었다. 그 점원은 점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그것을 무례로 느낀 것은 한국 사회의 과도한 감정노동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갑질’이 만연한 사회다. 사회‧경제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되면, 상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무례하게 구는 것이 일상이 된 사회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을까? 항공사 소유주(정확히는 소유주의 딸)가 기내에서 땅콩을 봉지째 가져왔다는 이유로 비행기를 돌려세워 승무원을 하차시키는 사회다. 그뿐인가? 대기업이 중소기업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부당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회다.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사적인 일을 부탁하는 경우는 얼마나 흔한가? 백화점에서 점원이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면 짜증을 내는 손님들은 얼마나 많던가? 식당에서 점원이 웃으며 친절히 대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손님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우리는 이런 부조리한 사회를 일상이라 부르며 산다.
자기방어의 세 가지 마음
이런 ‘갑질’ 문화는 왜 생겼을까? 황금만능주의 때문인가? 즉, 돈 많은 자가 ‘갑’이 되고, 돈 없는 자가 ‘을’이 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가? 이는 피상적인 이유일 뿐이다. ‘갑질’ 문화는 근본적으로 피해의식 때문에 발생한다. ‘갑질’과 ‘피해의식’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피해의식은 과도한 자기방어의 마음이다. 이 과도한 자기방어의 마음은 뒤틀어진 형식으로 나타나곤 한다.
자기방어는 기본적으로 살려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 자기방어의 마음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같이 살려는 마음’, ‘혼자 살려는 마음’, ‘같이 죽으려는 마음’. 이 세 가지 자기방어의 마음은 피해의식의 강도와 관계되어 있다. ‘같이 살려는 마음’은 피해의식이 거의 없는 마음 상태다. ‘혼자 살려는 마음’은 피해의식은 덜한 마음 상태이고, ‘같이 죽으려는 마음’은 피해의식이 심한 마음 상태다.
성적에 대한 피해의식을 예로 들어보자. A, B, C 세 사람이 있다. A는 성적에 대한 피해의식이 거의 없고, B는 이 피해의식이 덜하고, C는 이 피해의식이 심하다. 이 세 명 모두 자기방어의 마음이 있다. 하지만 이 자기방어의 마음이 나타나는 양상은 현격하게 다르다. 피해의식이 거의 없는 A부터 말해보자. A는 자기 성적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친구들 역시 성적이 오를 수 있도록 진심으로 도와준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없을 때의 ‘같이 살려는 마음’이다.
피해의식이 덜한 B는 어떨까? B는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을 올리려고 할 뿐, 친구들을 도와주지는 않는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덜할 때의 ‘혼자 살려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피해의식이 심한 C는 어떨까? C는 자신은 공부하지 않으면서 모두 성적이 떨어지기를 은근히 바라거나 혹은 주변 사람들이 공부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심할 때의 ‘같이 죽으려는 마음’이다.
같이 죽으려는 마음
의아할 수 있다. ‘같이 죽으려는 마음’이 왜 자기방어의 마음인가? 같이 죽는 것은 결국 나에게도 해악이 되는 일 아닌가? 이는 자신을 방어하기보다 자신을 파괴하려는 마음에 가깝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이는 명백히 자기방어의 마음이다. 피해의식이 낳는 치명적인 감정인 억울함을 통해 이를 설명할 수 있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늘 억울하다. 자신만 억울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의 자기방어는 억울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억울함 때문에 삶이 파괴되고 있으니, 그 억울함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억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만 성적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여기는 이는 어떻게 그 억울함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자신 역시 우등생이 되거나, 모두가 열등생이 되거나.
전자는 피해의식이 덜할 때의 자기방어의 마음이고, 후자는 피해의식이 심할 때의 자기방어의 마음이다. 물론 후자는 어리석은 마음이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에게는 정합적이다. 그들은 억울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다 같이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자신을 방어하는 일이다. 그때 자신이 억울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이 심해지면, 자신이 상처받았기 때문에 모두가 그 상처를 받기를 바라는 뒤틀린 마음에 잠식된다.
피해의식은 ‘같이 죽는’ 방식의 자기방어다
피해의식이 과도해질 때, 그 마음은 ‘같이 사는 방식’이 아닌, ‘혼자 사는 방식’ 혹은 ‘같이 죽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외모 때문에 상처받았던 이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혼자 사는 방식’과 ‘같이 죽는 방식’이다.
전자는 자신도(혹은 자신만)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방법이고, 후자는 모두 못생긴 외모를 갖게 만드는 방법이다. 사실 전자는 큰 문제가 아니다. 혼자라도 살려고 하면 피해의식이 점점 옅어지는 선순환 속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뚱뚱한 외모 때문에 상처받았던 이들이 다이어트를 해서 매력적인 외모를 갖게 되면 그 피해의식은 점점 옅어지게 되는 것이 이 경우다.
문제는 후자다. 피해의식으로 인해 모두 못생긴 외모를 갖게 만들려는 마음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너’와 ‘우리’마저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은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 있는 이들을 과도하게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칼을 들고 찾아가 매력적인 이들의 얼굴에 칼자국이라도 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뒷담화라도 해서 그들을 못난 존재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이처럼 피해의식의 바닥에는 같이 죽고 싶은 파괴적인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피해의식은 공동체를 파괴한다
이제 우리는 ‘갑질’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나의 ‘갑질’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왜 나의 무관심과 불친절에도 불구하고, 점원들이 친절한 미소로 응대해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직장과 돈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이었다. 직장에서 돈을 벌기 위해 사장과 상사의 비위를 다 맞춰주며 살았다. 사장과 상사 앞에서 한없이 위축되어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살았다. 직장 생활을 하는 그 긴 시간 동안 그 피해의식에 잠식된 채로 살았다. 그 때문에 나는 뒤틀어진 자기방어의 마음에 잠식당해있었다.
나는 다 같이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방식(같이 사는 방식)으로 나를 보호하지 못했다. 나 혼자라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방식(혼자 사는 방식)으로도 나를 보호하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다 같이 비굴하게 사는 방식(같이 죽는 방식)으로 나를 보호하려 했다. 그만큼이나 나의 피해의식은 심했다. 고백하자. “나도 직장과 돈 때문에 비굴하게 살고 있으니 너도 나처럼 비굴하게 살아!” “나는 돈을 벌려고 거짓 미소와 아첨을 하며 사는데, 너는 점원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당당하게 있는 거지?” 이것이 나의 ‘갑질’ 근성의 바닥에 있는 적나라한 마음이었다.
이는 비단 나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 시대 가장 보편적인 피해의식인,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이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을 살펴보라. 그들은 가난 때문에 상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가난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다. ‘나’도 가난 때문에 상처받았으니, ‘너’도 ‘우리’도 모두 가난 때문에 상처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함께 최저 임금을 올릴 생각을 하기보다 ‘나’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이들에 대한 비난과 험담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그뿐인가? 군대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군대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의 마음은 뒤틀어질 대로 뒤틀어져 있다. 그들은 군대 때문에 상처받았으면서도, 다 같이 군대로부터 상처받지 않을 방법을 결코 찾지 않는다. ‘나’도 군대 때문에 상처받았으니, ‘너’도 ‘우리’도 군대에 가서 상처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끔찍한 범죄, 소위 ‘묻지마 범죄’ 역시 같은 맥락 안에 있다. 그런 범죄자들은 왜 이유도 없이 선량한 이들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것일까? 그 바닥에는 “내가 불행하니 모두가 불행해져라”라는 피해의식에 도사리고 있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같이 살자’는 마음이 아니라 ‘같이 죽자’는 마음이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방식이다.
피해의식은 거대한 감옥이다. 나도 죽고, 너도 죽고, 우리 모두 죽어야 하는 감옥. 피해의식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피해의식은 함께 살 길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는 길을 집요하게 찾는 파괴적인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