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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는 '과잉된 자의식'에서 나온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선택하고, 선택한 만큼 감당하며 살아라!  

   

“이렇게 될지 몰랐다.” 자신의 선택으로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흔히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옳다. 유한한 인간이 세상의 무한한 경우의 수를 어찌 다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던, 그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두 알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다 안다. 그런데 의아하다. “이렇게 될지 몰랐다”라는 말에 우리는 설득되는가? 그 말을 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 말에 화가 나거나, 아니면 흔한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로 치부하게 된다. 왜 그러는 것일까? 과속을 하다 보행자를 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말한다. “이렇게 될지 몰랐다.” 이는 사실이다. 과속을 한다고 모두 교통사고를 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의 말은 옳다. 그는 정말 몰랐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몰랐다”는 말에 설득되거나 그를 이해하게 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단돈 1000원을 아끼려고 몇 시간을 고민하며 스마트폰을 두들기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에서는(심지어 아주 사소한 문제에도) 그리도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문제(심지어 아주 심각한 문제에도)에는 크게 고민하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철저한 나르시스트적인 자세 때문에 “이렇게 될지 몰랐다”는 말에 분노하고, 그 말을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지 몰랐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내 돈 1000원을 아끼려는 고민만큼, 과속에 대해서 고민해보았는지 말이다. 내 돈 천 원을 아끼려는 만큼의 고민만 할 수 있어도 과속은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과속을 하더라도, 적어도 교통사고를 낼 정도로 부주의하게 과속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될지 몰랐다”고 쉽게 말하는 이들은 대부분 과잉된 자의식 똘똘 뭉친 유아적인 존재들이다. 자신에게 관대한 만큼, 세상도 자신에게 관대할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믿는 유아적인 존재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렇게 될지 몰랐다”는 말에 납득이 되고,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화가 나거나, 그말을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로 치부할 수 밖에. 


 "이렇게 될지 몰랐"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유아론적 태도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대부분은 이미 벌어진 그 일 앞에서 수동적이거나 조건부적 자세를 취한다. 그들은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라고 말하거나 “누군가 책임을 묻는다면 책임을 지겠어”라고 말한다.수동적이거나 조건부는 아이들의 태도다. 이는 모두 결국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니까. 


 유아적이지 않는 이들도 “이렇게 될지 몰랐다”고 말할 수 있다, 불운한 일은 유아적 존재들에게만 찾아오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수동적이거나 조건부적이지 않다. 이렇게 될지 몰랐던 일이지만 능동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일들을 찾고 해나간다. 그게 어른의 자세니까. “이렇게 될지 몰랐다” 말하기 전에 어른이 되어라. “이렇게 될지 몰랐다” 말했어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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