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에 대처하는 자세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중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중독은 코나투스의 발현이라네.” 의아했던 스피노자의 말로 돌아가자. 도대체 왜 중독이 코나투스라는 말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중독의 메커니즘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한다. ‘좋아하는 일→과도한 탐닉→ 중독’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중독의 메커니즘이다. 좋아하는 술을 마시다가, 그것에 과도하게 탐닉하게 되고, 결국 하루 종일 술 생각만 하게 되고, 술을 못마시게 될 때는 불안해지는 것. 급기야 술 이외의 것들에는 어떠한 관심도 갖지 않게 되는 것. 이렇게 중독의 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좋아하는 일을 과도하게 탐닉해도 중독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틈만 나면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하고, 거의 매일 책상에 앉아서 3~4시간씩 쓴다. 하지만 나는 글쓰기에 중독되지 않았다. 세상을 글쓰기와 글쓰기 아닌 것들로 구분하지 않는다. 글쓰기만큼 가족, 친구, 음악, 꽃이라는 소중한 세계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술 중독된 이와 나는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술은 쓸모없는 것이고, 글쓰기는 의미 있는 일이라서 그런가. 결코 아니다. 중독의 메커니즘에서 결정적으로 놓친 것이 있다. ‘좋아하는 일→과도한 탐닉→중독’ 이 메커니즘에서 정작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중독될 대상을 애초에 왜 좋아하게 되었는가?’ 중독의 진짜 메커니즘은 이렇다. ‘( ) → 좋아하는 일→과도한 탐닉→ 중독’ 여기서 ( )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 )안에 들어갈 말은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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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의 시작은 절망이다.


유튜브, 게임, 술, 도박에 중독된 이들이 있다. 이들이 처음부터 그것들에 중독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중독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질문이 필요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왜 좋아하게 되었을까? 절망 때문이다. 절망이 무엇인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불행한 현실이다. 그 현실 때문에 유튜브, 게임, 술, 도박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공부해도 부모가 원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을 때 유튜브와 게임을 켤 때. 지금 불행한 삶이 바뀌지 않을 것 같을 때 술과 도박을 손을 대게 될 때. 이때 이미 중독은 시작된 셈이다.


“중독은 코나투스의 실현”이라는 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불행한 현실. 그 절망은 우리를 서서히 죽게 만든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말처럼, 인간은 어떠한 경우도 자신의 보존하려고 노력(코나투스)한다. 공부해도 성적이 안 나올 것 같을 때 계속 공부만 하면 어떻게 될까? 점점 절망하게 된다. 절망은 서서히 인간을 죽게 만든다. 우리는 그것을 피하고 싶어서 유튜브와 게임을 켜서 작은 즐거움이라도 찾으려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유튜브와 게임을 몰입하는 것이다.


“정신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하는 사물을 가능한 한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에티카」 스피노자


중독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신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는 사물을 가능한 떠올리려고 노력”하게 마련이다. 서서히 우리를 죽여 가는 불행한 현실 앞에서 작은 즐거움이라도 찾아 자신을 보존하고 지키려는 자연스러운 행동. 이것이 바로 중독의 진짜 메커니즘이다. 자살은 중독된 대상조차 없는 이들이 하는 비극적 선택이다. 유튜브, 게임이라도 할 수 있다면 절망스러운 삶에서 어찌어찌 버텨 나갈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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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중독은 그저 중독된 상태로 있으면 되는 것일까? 아니다. 중독은 절망 속에서 겨우 삶을 연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중독은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의 선택인 셈이다. 그저 살아있기 위해 중독되어 있는 삶. 다채로운 세상을 중독된 대상과 그것 아닌 대상으로만 보는 삶. 그것은 너무 불행한 삶 아닌가. 중독되었다면 혹은 중독을 향해 치닫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중독이 시작된 곳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절망. 절망하지 않으면 중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절망은 일종의 환상이다. 절망은 현실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절망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불행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현실은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망이 아니다. 오직 내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불행한 현실만 절망이 된다. 어떤 불행한 현실이 닥쳐왔을 때, ‘나는 그것을 결코 극복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마음먹을 때 만들어지는 상상. 그것이 바로 절망의 정체다.


절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명하다. ‘나는 그 현실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면 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불행한 현실에 맞서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세상의 기준만큼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분명 불행한 현실이다. 그때 그 불행한 현실에 맞서보면 된다. 불행한 현실에 맞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둘 중 하나다. 최선을 다해 돈을 벌기! 혹은 최선을 다해 돈을 벌기 않기! 그때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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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현실에 맞서기


최선을 다해 돈을 벌려고 애를 써본 이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과와 상관없다. 원하는 만큼 돈을 벌었느냐 벌지 못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원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최선을 다해보았다’는 그 경험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는 법이 없다.


반대로 최선을 다해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아도 절망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 "돈보다 소중한 것들은 많아!" "돈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거야!" 당당하게 세상 앞에서 외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절망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결과와 상관없다.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 불행한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이 열린 이들에게 결코 절망은 없다.


이렇게 불행한 현실 앞에서 정면으로 맞서는 이들은 중독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일을 좋하더라도, 절망으로 인해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돌아보라. 최선을 다해 공부를 했던 아이도 게임도 하고 만화책도 본다. 하지만 결코 중독되지 않는다. 그저 즐길 뿐이다. 최선을 다해 공부하지 않기 위해 대안학교를 간 아이들을 알고 있다. 그들 역시 유튜브도 보고 게임도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것에 중독되지 않고 건강하게 즐길 뿐이다.


중독은 금지와 억압, 통제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중독에 대한 가장 큰 오해다. 금지는 욕망을 더욱 불러일으킬 뿐이다. 인간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게 되는 존재이니 말이다. 중독을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내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불행한 현실에 당당하게 맞서보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건강하게 즐길 수 있고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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