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희망'과 '공포'
동전의 앞 뒤, 희망과 공포
“공포 없는 희망은 없으며, 희망 없는 공포도 없다.” 「에티카」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말은 옳다. 공포 없는 희망은 없으며, 희망 없는 공포도 없다. 희망 때문에 공포에 휩싸이고, 공포 때문에 희망을 갖게 된다. 이것이 야박한 삶의 진실이다. 그래서 과도한 희망은 결국 공포에 휩싸인 삶으로 우리를 내몬다. 예빈이는 가수를 희망하면서도 노래를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과도한 ‘희망’(멋진 가수가 될 거야) 때문에 과도한 ‘공포’(가수가 되지 못하면 어쩌지)에 잠식 당해버렸기 때문이었다.
희망은 좋은 것이 아니다. 희망에 집착해본 적 있는 사람은 다 안다. 연인이 떠나고, 직장에서 잘리고, 사고와 질병으로 건강을 잃게 될 때. 그런 고난이 닥쳐올 때 ‘희망’으로 그것을 돌파하려 해서는 안 된다. ‘다시 행복한 사랑을 하게 될 거야’ ‘다시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다시 건강해질 수 있을 거야’ 이런 ‘희망’은 ‘다시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없을지도 몰라.’ ‘다시 직장에 들어갈 수 없을지 몰라’ ‘다시 건강해질 수 없을지도 몰라’라는 ‘공포’가 된다.
‘희망’은 불확실한 기쁨이기에 결국 불확실한 슬픔인 ‘공포’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희망은 불확실하기에 반드시 공포로 되돌아온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과 달리, 희망이 희망적이지 않은 이유다. 이제 더욱 암담해진다. 삶은 고난의 연속 아닌가. 이런 고된 삶에 희망마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삶
‘희망’과 ‘공포’ 너머에 ‘사랑’이 있다. ‘희망 없는 삶’ 그 자체로는 희망 없는 삶을 버틸 수 없다. ‘희망 없이 어떤 것을 사랑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때 희망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예빈이는 언제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노래를 부르는 것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일 테다. 노래 한 줄 부르지 못하는 텅 빈 시간 속에서 예빈이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노래를 부를 것인가? 멋진 가수가 되지 못해도 노래를 부를 것인가?
‘그래도 노래를 부르고 싶다’ 이것이 예빈의 답이라면 희망도 공포도 없이 가수가 될 수 있다. 아니 희망과 공포를 넘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이미 멋진 가수다. 노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가수니까 말이다. 희망 없이 노래하는 삶. 이것은 사랑으로 가능한 삶이다. 다른 삶 역시 마찬가지다. 희망 없이 사는 연습이 필요하다.
희망을 껴안고 사는 것은 얼마나 우울한 삶인가. 더 많이 ‘희망’하는 삶은 더 많은 ‘공포’에 내몰리는 삶 아닌가. 이런 번민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보다 우울한 삶도 없을 테다. 우리에게 닥쳐온 고난도 희망 없이 사랑하는 것으로 극복해나갔으면 좋겠다. 부모가 이혼하고, 대학에 떨어졌을 때, 희망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희망 없이 어떤 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다 잘 될 거야!’라는 억지스러운 희망 대신, ‘잘 되지 않더라도, 내 삶을 사랑할 거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행복한 연애를 하게 될 거야’라는 희망 대신, “이제 아무 희망 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거야”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년에 다시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 대신 “이제 아무 희망 없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을 거야”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희망과 공포 넘어 사랑하는 삶. 그 삶에 다가갈 때 진정으로 기쁘고 유쾌한 삶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