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은 없었다, 임신은 전쟁이었다”

임신과 출산, 버티기의 기록

by 시연

임신과 출산, 책임감으로 버텼던 시간


내 첫 임신은 축복보다 걱정으로 시작됐다.
백수 남편, 15평 투룸, 전 재산 5천만 원. 빚내서 들어간 1억짜리 빌라.
“축하해”라는 말보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먼저였다.


행복 대신 걱정


임신 초기, 내 몸은 오히려 마르고 있었다.
행복은커녕 불안과 근심뿐이었다.

남편은 다행히 취직했지만 연봉은 1천만 원이 깎였고, 야근은 더 많아졌다.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늘 혼자였다.
남편은 새벽녘에야 겨우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다.

나는 점점 아이보다 걱정을 더 키워가고 있었다.


지독한 입덧


입덧은 잔인했다.
운전석 옆과 회사 책상에는 늘 토할 통을 뒀다.
냉장고 문조차 열 수 없었다.
길거리 담배 연기 한 줄기에도 그대로 구토했다.

몇 달을 그렇게 보내다 보니, 치아가 녹아내렸다.
출산 후 교정을 해야 했고, 앞니는 모두 크라운으로 덮어야 했다.
의사는 내게 물었다. “거식증 환자셨나요?”
아니요, 저는 그저 임신부였을 뿐인데.


남편의 명언


집안일은 손도 못 댔다. 새로운 직장에 취직해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남편은 주말마다 청소와 빨래, 식사를 도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집안일은 안 하면 티가 엄청 나는데, 해도 티가 안 나.
더 억울한 건 내가 치운 걸 내가 다시 어질러야 한다는 거야.”

웃픈 명언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남편은 처음으로 집안일을 책임졌다.
아이를 기다리던 우리의 주말 풍경이었다.


또 다른 고통


입덧이 끝나자 이번엔 갑상선 저하증이 찾아왔다.
3개월 만에 체중은 23kg 늘었다.
극심한 두통, 참을 수 없는 소양증, 카페인 금단까지 겹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그땐 임산부가 쓸 약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후배 임산부들에게 줄 수 있는 약이 있다는 사실이, 그때의 나를 더 안쓰럽게 만든다.


회사와 책임감


출산휴가는 제도상 90일이었다.
육아휴직 제도도 분명 있었지만, 실제로 그걸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제도는 있었지만, 제도일 뿐이었다.
현실 속에서 임신한 직장인은 늘 혼자였다.

팀장은 인수인계를 미루다 미루다, 출산휴가 일주일 전에서야 맡겼다.
“무리하면 아이가 일찍 나올 수 있습니다.”
의사의 경고도 소용없었다.

멈출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유연함보다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버티는 직장인이었으니까.


출산의 순간


새벽부터 이어진 통증을, 나는 단순한 피곤함이라고 여겼다.
끙끙 앓다 잠들고, 또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아침 9시, 진료실.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출산하셔야 합니다.”


진통의 시간동안에도 남편은 팀장이 한 일을 해야했다.

출산입원병동에서 나는 진통과의 싸움을, 남편은 노트북과의 전쟁을 치뤘다.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10시간 반의 진통.

두 번의 무통 주사.

그리고 기절.

남편이 아이의 탯줄을 끊었다.
그 중요한 순간,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어진 통증


출산이 끝났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허리에 통증이 몰려왔다.
진통 중 무리했는지, 허리는 틀어진 듯했고, 나는 이후 오랫동안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아이를 안고 일어설 때마다, 내 몸은 다시 부서지는 듯했다.



남은 마음


돌아보면, 내 첫 임신과 출산은 축복보다는 전전긍긍의 연속이었다.
몸은 무너졌고, 마음은 늘 불안했다.

그럼에도 나는 출근했고, 버텼고, 일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내 첫 임신과 출산은 축복의 이야기가 아니라, 버티기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 기록은 더 이상 내 개인의 몫이 아니다.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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