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이후, 엄마로 살 수 없었던 시간
출산 후 나는 산후조리원으로 향했다.
다들 조리원에서 출산 동기들과 관계를 쌓는다는데, 나는 그것조차 싫었다.
그저 쉬고 싶었다.
최대한 방은 넓고, 혼자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돌아보면 그곳이 오히려 내게는 천국이었다.
남편은 바빴다.
퇴근 후 늦게야 들렀고, 대부분의 시간은 나 혼자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수많은 아가들 속에서 우리 아이는 단번에 눈에 띄었다.
남편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도 우리 아이를 보며 말했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네요.”
출산을 했는데도 몸무게는 오히려 늘어 있었다.
붓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거울 속 내 모습은 낯설고 무거웠다.
살은 빠지지 않았고, 불안은 더 깊어졌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전쟁이 시작됐다.
나는 밤을 새워 아이를 봤고,
엄마는 내가 잠든 새벽부터 아침까지 아이를 돌보았다.
남편은 곤히 잠들었다.
아이가 아무리 울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했다.
“신생아가 어떻게 새벽에 한 번도 안 깨냐?”
나는 웃지도 못했다.
아이는 두 시간마다 깼고, 내 밤은 완전히 사라졌다.
출산휴가는 제도상 90일.
육아휴직도 있었지만, 실제로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 90일이 끝나자마자 복직해야 했다.
몸은 여전히 부어 있었고,
살인지 붓기인지 알 수 없는 체중은 줄지 않았다.
피로는 덩어리째 따라붙었다.
그래도 다시 회사로 갔다.
엄마가 식당을 접고 아이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벌어야 했고, 엄마는 그런 딸을 위해 버려야 했다.
엄마가 식당을 접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다.
홀어머니였고,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엄마는 기꺼이 나 대신 아이 곁에 있어주었다.
나는 감사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용돈을 드려야 했고, 아이와 함께 살 수도 없었다.
15평 투룸에는 우리가 셋이 함께 있을 자리가 없었다.
결국 아이는 친정에서 자랐다.
의외로 엄마와 남편은 태연했다.
엄마는 담담했고, 남편은 무심할 정도로 차분했다.
나는 전전긍긍했는데, 정작 둘은 평온해 보였다.
더 아픈 건 아이였다.
아이에게 나는 엄마였지만, 주말마다 찾아오는 손님 같았다.
아이와 헤어질 때 아이는 울지 않았다.
금세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아이는 멀쩡했다.
그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평일에는 일했다.
주말이면 두 시간을 운전해 친정으로 달려갔다.
도로 위에는 피로가 고여 있었다.
차창 너머 풍경은 흘러가는데, 내 몸은 무거워졌다.
주말은 약속된 위로의 시간이면서도, 죄책감의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아이의 첫 미소, 첫 뒤집기, 첫 말을 놓쳤다.
그 공백이 내 가슴을 시리게 했다.
출산 후에도 나는 온전히 아이를 사랑할 수 없었다.
우리 아이 태명은 사랑이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 그보다 먼저 걱정이 밀려왔다.
‘어떻게 키우지?’
‘경제적으로 버틸 수 있을까?’
내 머릿속은 계산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
사랑은 늘 뒷자리에 숨어 있었다.
그런 내가 스스로도 안쓰러웠다.
엄마로서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 부족함이 죄책감을 불렀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늘 다른 곳에 있었다.
돌아보면, 그 시절 나는 너무 힘들었다.
아이와 떨어져 지내며 매 순간을 놓쳤고, 걱정 속에서 사랑마저 희미해졌다.
하지만 이제 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선택지가 없었던 시대, 좁은 현실 속에서 버티던 기록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이미 최선을 다했다.
네가 안쓰럽게 보일지라도,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몸보다 더 아픈 고통은, 회사에서 다시 시작될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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