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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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거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부대찌개, 돼지국밥, 돌솥밥, 냉면이 차례로 김대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도 좋네요. 날씨랑 잘 어울리구요. 나는 그저 그의 말에 맞장구만 칠뿐이었다. 삐걱거리는 엘리베이터가 소리를 멈출 때까지 김대리의 입에서는 쉬지 않고 메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문을 열 때 이 과장의 입이 열렸다. <그럼 청국장집으로 가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김대리는 수많은 음식을 입에서 내뱉고 나는 그저 맞장구만 칠 뿐이었다. 이 과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항상 <그럼 청국장집으로 가지>뿐이었다. 그럼 나는 역시 그것도 좋네요. 날씨랑 잘 어울리구요. 이런 하루들이 반복될 뿐이었다. 우리가 점심 메뉴를 정하는 동안에도 도라지들은 계속해서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앞질러 가고 있는 김대리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멈추고 도라지는 다시 한 번 머리를 내밀었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것은 순식간에 김대리의 손목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손목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다급히 그의 손을 낚아채었다. 김대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손을 뿌리쳤다. 뭐 하는 겁니까? 그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저, 손에. 제 손이 뭐 어쨌다고요? 아, 죄송합니다. 그는 내가 잡았던 손목을 몇 번 쓰다듬었다. 나는 도라지가 스며들었던 그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자리에는 푸른 반점 몇 개가 돋아나 있었다.
도라지 다음에는 반점이라니. 이 무슨 또라이 같은 하루냔 말이다! 식탁에 앉아서도 나는 그의 손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실눈을 뜨고 봐야 보일 만큼 작고 푸른 반점들이 김대리의 손에 돋아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반점이라기보다는 씨앗 같은 모습이었다. 푸른빛을 띠고 있는 반점은 왠지 모를 생기가 느껴졌고, 당장이라도 김대리의 피부를 뚫고 돋아날 것만 같았다. 김대리는 그것은 아는지 모르는지 지겹도록 먹었던 청국장을 칭찬하기 바빴다. 그리고 중간중간 그렇지? 그치? 라며 나를 보고 물었다. 그럼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눈웃음을 지으며 그저 네, 네. 그렇고 말고요.
이과장과 김대리가 숟가락을 놓자 나 역시 숟가락을 놓았다. 며칠 동안 청국장을 먹었는데도 남기지 않는 그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커피를 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가 시킨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과장님은 밀크커피. 김대리는 율무차. 그리고 나는. 나는 뭐였더라. 커피를 다 뽑았을 때쯤엔 이과장이 법인카드로 계산을 끝낸 후였다.
사무실로 돌아온 후에는 어제와 변함없는 하루였다. 점심시간 동안 쌓여있는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고, 결제를 받으러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고, 계획서를 쓰고, 계획서가 왜 이따위야? 예? 아, 예. 예. 그러다 보니 퇴근 시간이 넘어가고, 야근을 하고, 다시 계획서를 쓰고, 다시 쓴 계획서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간 후에야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결국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였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잠을 자고 있었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누구는 모르는 사람의 어깨에 기대서 잠을 자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꿈을 많이 꾸는 사람은 아마도
‘직장인’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무슨 꿈을 꾸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들 손에는 아침처럼 도라지들이 들려있지 않았다. 그 많던 도라지들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이제 나도 꿈을 꿀 시간이 된 거 같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맡을 청국장의 꾸덕한 냄새를 잊을 만한 꿈을.